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책방에 가면 인문학 코너에 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베스트셀러이자, 한국 인문서를 대표하는 10권이 넘는 시리즈이다. 내게는 여행 코너에 놓아도 손색없는 여행 안내서로 읽히는 책이다.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도 정보를 얻기 위해 유튜브를 보는 시대지만, 그의 책속에는 인문서라고 할 만한 풍부한 문화·역사적 내용과 여행심을 부르는 이야기가 들어 있어 좋다.
책 시리즈 가운데 최근에 출간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21 : 서울편4>은 서울에 사는 내게도 흥미롭고 가보고 싶게 하는 여행지들이 소개돼 있는 책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조사하고 기록함을 뜻하는 '답사기'답게 여행지의 생생한 모습과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다.
'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라는 부제처럼 여행지마다 품고 있는 역사적 내용들은 흥미로움과 함께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SNS에 올릴 '인생샷' 찍으러 여행을 떠나는 시대에 색다른 여행을 부추기는 책이지 싶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떠났던 곳은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 담긴 특이한 이름의 망우산(忘憂山)이다. 지금은 많은 시민들이 찾아오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꾸미고 개명했다. 과거엔 서울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였다는 사실과 유관순 열사, 만해 한용운, 화가 이중섭, 정치인 조봉암 등 근현대사 인물 50여명이 잠들어 있다니 도저히 안 가볼 수 없는 곳이다.
이화학당은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해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런데 1935년에 이태원공동묘지 전체가 망우리로 이장할 때 무연고 묘로 분류되면서 여기에합장된 것이다.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때 순국했고 유관순 열사의 후손이 있을 수 없어 무연고 묘가 되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의 넋을 우리가 이렇게밖에 기릴 수 없게 되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유관순과 이중섭이 이곳에 묻히게 된 책 속 사연을 읽고서 고인의 무덤 앞에 서니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그리워하던 두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 새겨진 이중섭 무덤 앞 작은 묘비는 가슴속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 누명을 쓴 채 사형 당한 아까운 정치인 죽산 조봉암의 무덤도 빼놓을 수 없다.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시절, 죽산은 극우와 극좌를 배척하는 중도의 길을 걸었다. 진보당 당수로서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200만 표를 넘게 얻어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협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2011년 대법원은 조봉암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묘비에는 고인의 억울한 사연 한 줄 없이 호와 이름만이 새겨져 있어 후손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한양도성 성곽 아래 자리한 성북동 마을은 저자 유홍준이 서울에서 가장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마을에 남아 있는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최순우 옛집, 이태준의 수연산방, 배정국의 승설암, 우리옛돌박물관 등에 담겨있는 사연과 풍경에 눈길이 머문다.
정부 관료들과 재계 인사들의 흥청망청 요정이었던 대원각에서 사찰이 된 길상사는 성북동 필수 여행지다. 요정을 지었다가 사찰로 기부한 건립자 김자야의 삶이 놀랍고, 연인이었던 시인 백석과의 사랑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선 왕릉은 어디나 비슷비슷해서 잘 안 가게 되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도굴당하고 불타버렸던 비운의 조선왕릉 선정릉은 예외다. 전쟁 후 범릉적을 잡아 보내라고 강력하게 요구하며 탐적사와 쇄환사를 보내 일본에 있던 피로인(전쟁포로)을 송환받은 역사 이야기는 현재의 진행형의 일인 듯 생생하다.
당시 왕릉을 도굴하고 불태웠던 범릉적이라며 일본이 조선에 보낸 2명의 일본인은 진범이 아닌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옛 부터 일본정부가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은 그를 조선의 화성(畵聖)이라고 부를 정도로 저자가 좋아하는 화가다.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에 가면 비에 젖은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에서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명소를 그린 <경교명승첩>등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된 그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아름다운 강변 정자 압구정과 선유도, 난지도 등 여러 섬이 떠있는 서울 한강 풍경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뽕나무에서 뽕잎을 먹고 사는 누에를 키워 실을 뽑았던 동네 송파구 잠실(누에蠶 집室)이 옛날엔 섬이었다는 사실 등 한강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블로그 blog.naver.com/sunnyk21 에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