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기를 맞아 역사의식에 눈이 트인 이상룡은 고향 안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가야산을 무대로 하는 의병기지 건설이었다.
이상룡은 경남 거창군 가조(加祚)의 의병장인 차성충과 연락하며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쟁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그는 1906년 새해를 거창에서 맞고, 의병기지 건설과 거병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908년 정월에는 1만민금(萬緡金)을 거창으로 보냈다. 그런데 자금을 보낸 직후 차성충이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2월에 거창 주둔 일본군이 알아채고 기습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이상룡은 영덕의 신돌석의진과 영주·봉화에서 활약하던 김상태의진에 기대를 걸었지만 이마저도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의병항쟁이 가지는 방략상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계몽운동이었다. (주석 7)
이상룡이 전개한 계몽운동에는 우선 유인식·하중환·김동삼 등이 1907년 안동에 세운 협동학교를 지원했다. 교원은 지역 유지들과 서울에서 신민회가 파견한 3인의 교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학교는 존립기간이 짧았으나 안동의 청년들이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하였다.
(협동학교)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안동지방의 유림 개화에 공헌하였다. 학제는 3년제 중등과정으로 출발하였으며, 중등과정이면서도 초등과정을 병설한 것 같다. 1908년부터 수업을 시작한 뒤, 1회 졸업생이 1911년 3월에 배출되었다. 당시 교과내용은 역사·국어·대수·화학·생물·체조·창가·외국지지 등 17개 과목이었으며, 교과서로는 <대한신지지>·<외국지리>·<중등생리학>·<신찬생리학>·<식물학교과서>·<상업대요>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협동학교가 배출한 졸업생은 80명 정도로 졸업생 대다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협동학교는 학생들에게 단발을 강요하였다는 이유로 1910년 7월 최성천 의병에 습격을 받아 교감 김기수·안상덕과 서기 이종화가 살해되기도 하였다. 그후 새로이 김하정과 김철훈이 선임교사로 들어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안동에 대한협회를 창립한 석주 이상룡이 협동학교를 크게 지원하였다. (주석 8)
이 시기 이상룡은 향촌의 각급 계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스스로 서양사상과 학문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였다. '자기계몽'도 열심히 한 것이다. 베이컨·데카르트·칸트·다윈 등 근세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고 지식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전통유학에서 혁신유학을 거쳐 근대적 서양학문에 접하면서 시대와 시국을 보는 안목이 그만큼 넓고 깊어졌다. 이같은 변화는 자신만에 머물지 않고 가족·친지·이웃으로 넓혀졌다.
서양 근대사상 수용 과정에서 그가 보인 특징은 향촌을 변혁운동이나 저항운동의 단위로 설정하고, 무장투쟁을 방법으로 선택하여 만주망명 이후로도 줄곧 이어갔다는 점이다. 또 그는 자신의 유학 사상을 기반으로 삼고 서양 사상을 재해석하여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정립해 나갔다. 이러한 태도는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이나 서간도 독립기지 건설 과정에서도 한 줄기로 이어졌다.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은 법흥문중이 빠른 속도로 사상적인 변화를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문중 인사들이 여기에 주력으로 참가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누구보다 동생 이봉희(李鳳羲,1868~1937)의 힘이 컸을 것이고, 아들 이준형(1875~1942)이 실무를 맡았다고 전해진다. 또 만주망명에까지 동참하게 되는 나이 어린 종숙, 그러니까 이상룡의 막내 종조부의 아들인 이승화(1876~1937)도 대한협회 안동지회 활동에 열심히 나섰다. (주석 9)
주석
7> 김희곤, <법흥마을사람들이 펼친 독립운동>,(학술강연원고), 12쪽, 2015년 11월 14일, 안동시민회관.
8> 조동걸, <협동학교>, <한국독립운동사사전(7)>, 553쪽, 독립기념관, 2004.
9> 김희곤, 앞의 글, 15·1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