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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두체리에서 기차로 세 시간을 달렸습니다. 이제 이 정도는 아주 쉬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푸두체리를 여행하고 델리로 간다는 옆 자리 승객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영화 한 편을 보니 어느새 내릴 시간입니다. 그렇게 인도 여행의 마지막 도시, 첸나이에 도착했습니다.
 
첸나이의 리폰 빌딩
 첸나이의 리폰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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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나이는 타밀나두 주의 수도입니다. 델리, 뭄바이, 콜카타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4대 도시라고 할 수 있죠. 각 도시가 차례로 북부, 서부, 동부를 대표한다면 첸나이는 인도 남부를 대표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첸나이는 타밀어권의 중심이 되는 도시입니다. 타밀어는 타밀나두 주뿐 아니라 스리랑카의 타밀인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하죠. 동남아시아의 인도계 이민자들도 타밀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타밀어는 국제적인 영향력도 큰 언어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첸나이는 중요합니다. 자동차 산업이 특히 발달한 도시죠. '인도의 디트로이트'라는 별명도 있다고 합니다. 현대차와 닛산차의 공장이 첸나이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첸나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밀나두 주정부 청사
 타밀나두 주정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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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다면, 첸나이보다는 옛 이름이 더 익숙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첸나이의 옛 이름은 '마드라스'입니다. 항구도시로 유명했던 땅이죠.

남인도와 북인도는 많은 면에서 다릅니다. 역사적으로도 오랜 기간 다른 경험을 해 왔죠. 남북 인도를 모두 통일한 왕조도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인도에는 촐라 왕조, 판디야 왕조 등 북인도와는 다른 왕조가 오랜 기간 존속했습니다.

남부는 해안과 접해 있던 만큼, 외국과의 교류도 잦았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으로 막혀 있던 북인도와는 지리적인 요건이 달랐죠. 아랍권이나 유럽과의 교류도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첸나이 교외의 해변
 첸나이 교외의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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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덕분에 남인도는 기독교의 역사도 깊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했을 때,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사도 토마스였죠. 토마스는 예수를 직접 보고서야 예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제자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하죠.

성경에 따르면 이후 예수는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남은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 토마스는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동방으로 향한 토마스는 인도 첸나이에서 순교했습니다. 지금도 첸나이에는 토마스의 무덤 위에 지은 성당이 남아 있습니다.

덕분에 남부 지역에는 기독교 인구가 많은 곳이 꽤 있지요. 첸나이의 경우 기독교도 인구가 8% 정도이지만, 북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성당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유럽 열강의 침략도 물론 북인도보다 빨랐습니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이 차례로 무역을 통해 첸나이 지역에 정착했죠. 작은 어촌이었던 첸나이가 크게 성장한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건설한 영국인 거주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실 남인도의 많은 도시들이 비슷한 역사를 겪었습니다.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확인하는 성 토마스의 동상
 부활한 예수의 상처를 확인하는 성 토마스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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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른 역사를 겪어온 만큼, 남인도와 북인도의 정서는 많이 다릅니다. 특히 첸나이가 속한 타밀어권의 경우, 북인도의 언어인 힌디에 대한 반감도 심한 편입니다. 거리의 안내판도 타밀어와 영어로만 쓰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밀나두는 인도의 언어를 힌디로 통일하려는 시도에 강력히 저항하는 지역이라고 하죠. 1960년대에는 힌디 국어화 정책에 반발해 소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타밀나두 주정부는 '드라비디언 진보연대(DMK)'라는 지역정당이 집권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역정당이 활성화된 인도 정치의 특성을 고려해야겠지만요.

식문화도 남부와 북부는 크게 다릅니다. 요즘이야 구분이 흐려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리의 종류는 분명 다릅니다. 주식도 북인도는 난(Naan)을 비롯한 빵을 위주로 한다면, 남인도는 쌀을 위주로 합니다. 그러다보니 여행자에게든, 현지인에게든 이런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남인도는 다르다"고요.
 
성 토마스의 무덤 위에 지어진 성당
 성 토마스의 무덤 위에 지어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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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 차례 이민족의 식민지배를 겪은 북인도보다, 오히려 영국의 지배만을 겪은 남인도가 인도의 본질을 더 잘 보존한 지역이라고요. 실제로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드라비다인이 내려와 남인도인이 되었다고 하고요.

무엇이 인도의 본질인지, 저는 알 수 없겠죠. 겨우 두 달을 스쳐간 여행자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인도는 다양하다는 사실입니다.

"남인도는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 남인도만은 아니었습니다. 콜카타의 허름한 골목. 무슬림이 세운 아그라의 유적. 펀자브의 키 큰 시크교도. 라자스탄의 황량한 사막. 뭄바이의 영국과 닮은 골목. 벵갈루루의 커다란 쇼핑몰까지. 이 모든 것이 인도의 일부였습니다.

어쩌면 인도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양하다는 것. 그것이 인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첸나이의 성공회 성당
 첸나이의 성공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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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의 인도, 일률적인 힌두의 국민국가를 주장하는 인도의 집권세력에게는 불편한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것이 인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콜카타와 다람살라와 고아의 풍경은 너무도 다릅니다. 건물도, 사람도, 음식도, 언어까지도 다릅니다. 그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이 인도의 특징이고, 힘입니다. 세계 최대의 민주정을 가진 인도의 힘입니다.

첸나이의 도심을 둘러보았습니다. 첸나이는 대도시입니다. 하지만 첸나이도 델리와는, 뭄바이와는, 콜카타와는 또 다릅니다. 모든 인도가 그렇습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그렇습니다.

인구 14억이 모두 다른 땅. 모두의 다양성이 함께할 수 있는 땅. 여전히 인도는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 다양함이 가진 힘을 믿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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