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정희진은 2005년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페미니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여성학자이다. 대학의 여성학 개론서로 활용되어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어서 그는 <아주 친밀한 폭력>, <낯선 시선>, <정희진처럼 읽기>에 이어 5권의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등 10권의 단독 저서를 발간한다. 여러 매체에 논문, 영화평, 서평, 해제 등 다양한 글을 쓴다. 최근에는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책과 영화, 정치 등 다양한 이슈에 관한 자신의 사유를 목소리로 전달하고 있다.
정희진이 쓰고 말하면, 그가 다룬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론장이 마련되는 듯하다. 많은 (구)독자들이 다양한 관점을 배우고 생각과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고 한다. 그의 통찰을 이끄는 원동력에는 영화가 있는 것 같다.
영화광인 저자는 영화를 통해 타인을 읽고 사유를 넓힌다고 한다. 어떤 영화는 자신을 숨 쉬게 하고 구원한다고도 표현한다. 그의 영화 사랑은 책과 오디오 매거진에서도 이어진다. 책이 먼저 출간되는데, 바로 1997년부터 20년간 기록한 영화감상문인 <혼자서 본 영화>(교양인, 2018)이다.
정희진의 <혼자서 본 영화>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의 확장을 경험한 28편의 인생 영화와 주관적인 해석이 담긴 책이다. 1장 '사랑하기와 말하기 사이에서'는 사랑을 권력 관계로 정의하며 사랑 담론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낸다.
2장 '상처가 아무는 시간'은 고통을 겪은 사회적 약자가 지배 집단의 잘못을 어떻게 폭로할지를 보여준다. 3장 '젠더, 텍스트, 컨텍스트'에서는 여성주의 시각에서 해석한 영화를 통해 한국 여성의 현 위치를 드러낸다. 또한 작품마다 영화 주인공과 동일시하며 내면의 변화를 겪은 이야기에서 영화에 대한 애정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여러 이슈를 자기만의 관점으로 재정의한다. 영화의 주제를 다르게 접근하며 현실의 문제와 연결하여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를 뒤집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가족 담론이다."(p.27)라며 고정된 '정상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명료한 문장으로 서술함으로써 독자가 그것을 직시하도록 만든다. "피해자는 죄가 없다는 이 간단한 윤리, 아니 상식이 우리 사회에는 없다."(p.115), "입시제도, 경쟁은 한국 교육의 대표적인 적폐다. 전 국민을 망가뜨리는 시스템이다."(p.137)
책은 젠더적 시각으로 해석된 영화를 통해 한국 여성의 현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다룬 <송환>을 두고 "이 세계의 남성성에 관한 것"(p.171)이라고 밝힌다. 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낮은 목소리>를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의 주체이자 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장기수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부산물로 간주되는 위안부 여성은 비정치적 존재로서 '할머니'다."(p.174)
또한 <낮은 목소리>와 달리, <송환>은 장기수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자신에 대한 시선과 같았기 때문에 남성 내부의 타자가 필요 없었다. 대신에, 장기수와 감독의 삶을 지탱시켰던 여성의 노동과 고통은 타자화가 되었고 정희진은 이 부분을 지적하며 <송환>을 "여성사로 읽는다"(p.180)고 말한다. 현대사의 비극을 인권과 이념 문제로만 보는 관점을 넘어선 새로운 시각으로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저자는 여성을 타자로 보는 세상의 시선을 여성이 어떻게 극복할지를 보여준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것 중의 하나가 피해자로서만 여성을 규정하는 일이다. 정희진은 <밀양>의 여주인공을 통해 '순수한 피해자'로서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어서 피해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대안을 발견한다. 즉 피해 경험과 단절하고 자기 본모습대로 살았던 '마츠코'처럼 "결국 자신의 역량을 믿는 것"(p.133)이 스스로를 지키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여성이 피해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다소 시기상조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여성의 주체성과 남성과의 동등성을 위해서는 필요한 관점이며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정희진의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읽히기도 한다. 근거와 앞뒤 맥락이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한국은 동성(애자) 사회다. 한국에서 남자는 게이이고 여자는 레즈비언이다."(p.54), "남성 연대 앞에 가족은 없다."(p.121), "나는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발전이 없는 사람"(p.68)이라는 주장은 몇몇 독자들에게 급진적이고 편향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오는 이슈들은 대부분 논쟁적이며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들이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해야 할 주제들이다. 저자의 입장에 동조하든 반박하든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그 문제들을 수면 위에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영화에세이로서 영화에 대한 자기만의 느낌과 사유을 통쾌하게 서술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사회 구조적 문제를 예리하게 드러낸 점은 탁월하다. 영화를 즐겨 보거나, 여성주의적 시각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