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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에서 다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입니다. 코카서스 3국 중에서는 마지막 여행지입니다. 사실 아르메니아는 코카서스 국가 중 가장 궁금한 땅이기도 했습니다.

아르메니아 공항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습니다. 큰 승합차에 가까운 차가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고 있더군요. 시내에도 버스와 함께 노선 번호를 단 승합차가 많이 보입니다. 옛 소련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마르슈르트카(Marshrutka)를 그렇게 처음 타 봤습니다.

곧 시내 중심가인 공화국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주말 도심의 모습은 평화롭습니다.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도 몇 번이나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예레반의 공항버스
예레반의 공항버스 ⓒ Widerstand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저는 아르메니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르메니아 문자나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같은 독자적인 문화 요소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죠. 2018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혁명도 인상깊게 바라본 기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역사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원래 과거에 '아르메니아'라고 불렸던 땅은 지금의 아르메니아보다 넓은 땅이었습니다. 현대 튀르키예 동북부까지 포함하는 지역이었죠. 이 지역에 기원전 6세기 경에 처음으로 '아르메니아'라 불리는 집단이 구성됩니다.

아르메니아 왕국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원전 1세기에는 독립해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로마 제국의 동쪽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죠. 시간이 지나며 아르메니아인이라는 독립된 정체성도 점점 강해집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카도기케 성당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카도기케 성당 ⓒ Widerstand

특히 기독교는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아르메니아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기원후 40년 무렵으로 아주 빨랐습니다. 이후 기독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대항하는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습니다.

아르메니아는 301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합니다. 로마는 아직 기독교를 공인하는 것이 313년, 국교로 지정하는 것은 392년의 일입니다. 그러니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이르게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종교에 대한 아르메니안의 자부심도 상당하죠.

그러니 당연히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로마 교황이 중심이 되는 가톨릭과는 다릅니다. 물론 한참 뒤에 만들어진 동방 정교회나, 개신교와도 다르죠.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는 시리아 정교회나 콥트 정교회 등과 함께 '오리엔트 정교회'로 분류됩니다.
 
 계몽자 그레고리우스 대성당
계몽자 그레고리우스 대성당 ⓒ Widerstand

아르메니아는 이후에도 페르시아나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오래 받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계속해서 유지되었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주변 지역을 이슬람 국가가 장악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 너머의 동로마 제국에는 동방 정교회가 만들어져, 역시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와는 갈등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은 종교를 기반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며 영향력을 키워 갔습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은 무역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죠. 종교를 기반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며 무역에 종사하는 것은 유대인의 역사와도 유사하죠. 실제로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은 무역로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서아시아의 지배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이들 모두 아르메니아인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르메니아인이 구성한 무역망을 이용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죠. 아르메니아인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부를 축적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공화국 광장의 밤
공화국 광장의 밤 ⓒ Widerstand

하지만 부유한 피지배민의 삶이 그리 평탄했을 리는 없습니다.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과 이란 사파비 왕조가 아르메니아를 두고 갈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강제 이주나 탄압도 벌어졌죠. 이것이 안정되자 곧 러시아의 남진이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 아르메니아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양분되었습니다. 특히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은 강력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죠. 오스만 제국 초기의 관용적인 정책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부유한 아르메니아인은 유럽과 러시아의 앞잡이로 몰렸습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던 시기,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1894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죠. 8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이 시기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기념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기념비 ⓒ Widerstand

물론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는 청년 튀르크당에 의해 축출됩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튀르크 민족주의의 발흥은 오히려 주변 민족에 대한 배제와 혐오로 이어졌습니다. 1909년에는 아다나 지역에서도 2만~3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며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완전한 적국이 되었죠.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낀 아르메니아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죠. 이미 다민족, 다종교 국가로서의 오스만 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1915년 4월, 아르메니아인 지식인들이 체포당했고 곧 대규모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시작됩니다. 1917년까지 학살, 강제 추방, 강제 노역 등이 이어졌죠. 아르메니아인뿐 아니라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등 튀르크인이 아닌 외부 민족은 모두 학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을과 공동체는 파괴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무슬림 가정에 입양시켜 무슬림으로 키우도록 했습니다. 여성은 얼굴에 문신을 새겨 상인 집단에 넘겼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의 공동체는 사실상 절멸되었죠.
 
 대학살 기념비 안의 불꽃
대학살 기념비 안의 불꽃 ⓒ Widerstand

전체 3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가운데 100만에서 최대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이 과정에서 학살당했습니다. 국가가 특정 인종과 정체성의 절멸을 목표한 제노사이드였습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은 역사상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각지로 흩어져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이주가 자유로운 면도 있었겠죠. 현재까지도 아르메니아계 인구는 아르메니아보다 외국에 더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영향력 덕분인지, 세계 각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고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여전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와 튀르키예의 외교 관계는 사실상 적성국에 가깝죠.
 
 학살 당시 사라진 마을의 이름을 적어둔 추모의 벽
학살 당시 사라진 마을의 이름을 적어둔 추모의 벽 ⓒ Widerstand

1939년 8월 22일,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누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기억하느냐"고요.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 질문 뒤에는 더 끔찍한 형태의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쉽고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갈등도 분쟁도 일으키지 않고, 과거는 과거의 것으로 그저 묻어두는 것이 훨씬 평화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책임을 묻고, 사과하고, 처벌하는 모든 과정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그런 방식으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30년도 되지 않아 인류사가 겪어야 했던 비극처럼 말이죠. 역사를 정리하는 것이 분란과 갈등만을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레반 공화국 광장의 평화는,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학살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책임도 사과도 거부하며 그것이 평화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평화란 없습니다. 학살의 기억이 사라진 빈 공간에, 우리 시대의 새로운 히틀러가 설 자리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세계여행#아르메니아#예레반#코카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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