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을 구원하여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라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외교의 기본으로 내세웠다. 오래 전 명이 망하고 청국이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이같은 속내는 변하지 않았다. 명나라의 지원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의 참전은 전쟁이 자국의 영토로 번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도 컸다. 조선왕조가 독립국가의 행위로서는 지나친 사대주의였다.
선조는 관군이 왜침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자신은 서둘러 의주로 피난한 데 반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전후 곽재우·정인홍·김덕령 등 의병장들이 지방사회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재조지은'을 내세워 전공을 명나라에 돌렸다. 그리고 국난극복의 공을 명군의 참전을 불러온 자신과 자신을 호종했던 신료들의 몫으로 돌렸다. 선조의 부끄러운 발언이다.
지금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 덕분이다. 우리 장사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적 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적 우두머리의 머리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시킨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에서의 승리와 권률의 행주대첩이 다소 빛날 뿐이다. 만약 명군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모두 호종했던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도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천조(天朝)에 호소했기에 적을 토벌하여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석 1)
선조는 자신을 호종한 신하들에게 서훈하고 의병장들은 배제하였다. 그리고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내세워 명군제독 이여송을 기리는 송덕비를 세우고 그를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을 비롯 중국 황제를 숭앙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짓는 등 '재조지은'을 국책으로 받들었다.
명군이 철수한 뒤에까지 이같은 일은 계속되고 갈수록 강화되었다. '외적보다 내변(內變)'을 두려워 한 선조와 신료들은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의 정책을 지속하고 이것은 후대에도 이어져 강고한 사대주의 모화사상으로 고착되었다. 광해군이 명과 청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정책을 펴다가 쫓겨나기까지 했다. 병자호란 후 한때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나 관료·유생들의 모화의식은 바뀌지 않았다.
아편전쟁 이후 청국은 서구열강에 밀려 쇄퇴의 길로 빠져들었다. 일본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청국의 책임이 크지만 조선 내의 전통적인 모화주의자들의 책임도 못지 않았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 1880년 9월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청국인 황준헌이 찬술한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이 책은 개항기 조선정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청국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요지로 하는 문건을 만들어 수신사를 통해 조선정부에 전달한 것은 당장은 남진하는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방어하려는 방략도 담겼으나 본질적으로는 대조선의 종주권 유지와 강화에 있었다.
청국은 1882년 8월 20일 오장경 인솔 하에 4천 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재조지은' 이래 느슨한 종속관계가 지속되었으나 왕위 문제나 구체적인 정책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이틀간의 격전 끝에 군란을 진압시킨 후 청국에서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한층 더 강화시키기 위해 조선의 국왕을 폐위시키고 한반도를 청국의 성(省)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고 조선에 고급관리를 상주시켜 정치적·군사적으로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왕조를 그대로 두고 내정간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원세개(袁世凱) 등이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상(馬建常)과 독일인 멜렌도르프 등을 정치와 외교 고문으로 보내어 관제와 군제를 개편한 후 외교와 내정에 깊이 간섭하는 한편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등의 무역조약을 맺어 경제적 침투에도 일본을 앞서 갔다.
아편전쟁 이후 영국·프랑스 등 서양 제국의 침략에 시달리던 청국은 일본의 조선 진출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종래의 의례적 종속관계를 근대적 실질적 식민지 관계로 바꾸기 위해 외교와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했던 것이다. (주석 2)
주석
1> <호성선무청산공신도감의궤>(규 14924), 만력 29년 3월 13일.
2> 강만길, <한국근대사>, 188~189쪽, 창작과비평사, 198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