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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기자말]
나는 미술관을 좋아해서 가는 것인가, 가다 보니 좋아진 것인가. 아니, 진짜 좋아하는 건 맞나?

해외여행을 다니면 늘 당연한 듯이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보곤 한다. 취향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기 복잡할 때 미술관과 박물관은 꽤 안전한 선택지다. 전전긍긍 예상하기 어려운 요소들에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티켓 예매만 하면 두어 시간 쾌적하게 보낼 수 있다.

특히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역사와 학문,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종종 호명되는 주옥같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어렵게 온 여행, 명작들을 '직관'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생과 함께라면, 이보다 좋은 문화교육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과연 아이의 마음도 그럴까? 돌이켜보면 내게 미술관은 늘 오기가 드는 장소에 가까웠다. 뭔가 신기하고 아름답고 대단한 것 같긴 하다. 그런 기분이 처음 10여 분은 든다.

그러다가 좋다고는 하는데 왜 좋은지 잘 모르겠는 그림들, 유명하다는데 왜 유명한지 잘 모르겠는 작품들, 대단하긴 한데 비슷비슷한 작품을 쉴 새 없이 지나치면서 조금 의기소침해지고 급기야 뭘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태에 이른다.

이제 이해하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는 오기가 고개를 든다. 나중에 미술사를 중구난방으로 찾아보다 보면, 기억하는 작품도 생기고 감상의 맥락도 약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사실은 내가 미술관을 좋아했고 잘 감상해 왔던 것은 아닐까 우쭐해진다. 그 순간, 현대 미술을 만나 또다시 자괴감에 빠진다. 이것이 나의 지난 미술 관람의 역사였다.

'미술관의 날' 선포에 고개 갸웃거리는 아들
  
프라도 미술관 앞 프라도 미술관 입구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동상이 있다.
프라도 미술관 앞프라도 미술관 입구에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동상이 있다. ⓒ 유종선
 
마드리드의 3대 미술관은 프라도 미술관(고야와 벨라스케스의 대표작들 소장),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샤갈, 달리 등 근현대 명작들 소장), 레이나소피아 국립미술관(피카소의 게르니카 소장)이었다. 프라도 미술관은 또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이기도 했다.

몇 대, 몇 대, 이런 표현을 들으면 속절없이 슬그머니 정복 욕구가 드는 것이 또 관광객의 얕은 속내다. 마드리드 첫날은 달리 스케줄을 구상할 여력이 없어, 오전에는 프라도, 오후에는 티센 미술관의 투어를 신청해놓고 하루 동안 투어를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걱정되는 것은 우주였다. 이 미술관 투어를 버텨줄까. 정면 돌파를 해보기로 했다. 나는 우주에게 오늘의 콘셉트를 제시했다.

"우주야, 오늘은, '미술관의 날'이야."
"네? 무슨 날이라고요?"
"미술관의 날! 우와 신나지? 재밌겠지?"


우주는 아빠가 과연 제정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새로운 도시에 오자마자 미술관부터 본다고? 그것도 두 개 연속, 하루 종일? 그게 신나고 재미있을 거라고?

첫 코스는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네 명의 여자 대학생 친구 그룹과 나와 우주가 멤버였고 남자 가이드분이 계셨다. 가이드는 '아빠-어린 아들'은 좀처럼 없는 구성이라며, 우릴 반겨주는 차원에서 여행객 에피소드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에피소드는 결국 늙은 아버지와 장성한 아들 둘이 여행 와서 싸운 얘기로 끝났다.

얘길 하다 취지와는 어긋난 결말에 스스로 놀란 가이드는, 그러나 우리는 나이대가 다르니 다를 것이라며 황급히 수습하더니 우릴 미술관 안으로 안내했다. 혹시 이런 상황을 그리스 고대 문학처럼 쓰면, 예언자 음유 시인의 신탁 같은 것이 되려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원제는 'Las Meninas'. 큰 그림으로 부분부분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원제는 'Las Meninas'. 큰 그림으로 부분부분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 유종선
 
나는 미술관 관람이 무척 좋았다. 특히 벽면 가득 걸려 있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직접 보는 순간은 감동적이고 초현실적이었다. 이 그림에는 겹겹의 레이어가 있다. 먼저 귀엽고 아름다운 왕녀와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엔 왜소증인 사람도 있다.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이 그림을 표지로 채택하면서, 이 왜소증 시녀에게로 감정이 머물게끔 했었다. 

관람객은 뒤이어 이 그림 속에 화가가 직접 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관람객 쪽을 똑바로 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화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이 화폭 자체가 왕녀를 비추고 있는 거울인 것일까? 그러다 그림 속 벽의 거울에 국왕 부부가 비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거대한 캔버스는 국왕 부부의 시선의 창이고, 그것이 관객의 시선이다. 관객은 국왕 부부로 분해 저 사랑스러운 왕녀를 쳐다보고 있는 셈이다. 벨라스케스의 설계에 의해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어두운 그림들도 마음에 깊게 남았다. 젊은 시절 고야의 그림은 밝았고 궁정 화가로서의 출세 가도를 달렸으나, 그의 그림은 점점 어두운 인간과 세상의 이면을 비춘다. <1808년 5월 3일의 학살> 같은 작품은 전쟁의 참화를 미화 없이 전달하는데,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의 일생을 가로지르는 화풍의 변화는 삶 한복판에 선 직업인으로서의 내게도 영감을 준다.
  
신나서 외친 우주의 한마디 
 
프란시스코 고야 <1808 5월 3일의 학살>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 당시를 남긴 그림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1808 5월 3일의 학살>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 당시를 남긴 그림이다. ⓒ 유종선
 
그러나 고야가 중요했던 가장 큰 이유는, 우주 때문이었다.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 가이드는 물었다. 여러분은 무슨 그림을 보기 위해 프라도에 왔나요?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우주가 대답했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요! 이 대답에 나도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우주가 한국에서 저 얘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린이 여행책에 저 그림과 고야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면서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란 어른들 반응에 우주는 신이 나서 자신이 아는 고야와 마하의 이야기를 입장 전부터 풀어놓으려 했고 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가이드분은 우주에게 마하 그림 앞에서 우주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우주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프라도 미술관 기행을 열심히 참아냈다.

드디어 우리는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 그림 앞에 당도했다. 가이드는 우주에게 마이크를 채워주었다. 우주는 잔뜩 긴장되고 상기된 목소리로 약간 더듬기도 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 고야는 <옷 벗은 마하>를 그리고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옷 입은 마하>를 그릴 수밖에 없었어요......"
  
프란시스코 고야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 프라도 미술관에는 나란히 걸려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프라도 미술관에는 나란히 걸려있다. ⓒ 유종선
 
난 우주에 대한 배려가 혹 다른 여행객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을까 진땀이 났다. 하지만 우주는 간결하고 담대하게 책에서 본 내용을 잘 전달했고, 친절한 누나들과 가이드의 박수를 받으며 발표를 마쳤다. 만 7세에겐 만만찮은 모험이었으리라. 우주에게 프라도에 대한 좋은 기억을 남겨준 가이드와 여행객들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잘 참던 아들, 이내 울음이 터졌다 

그 밖에도 프라도는 엘 그레코, 히에로니무스 보스, 뒤러, 라파엘로, 카라바조 등 마음을 설레게 하는 수 많은 화가들의 그림으로 가득 찬 풍요로운 곳이었다. 오히려 내가 신난 어린이 같았고, 우주는 어린이의 기호를 참아주는 아빠 같았다.

프라도 미술관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난 오후에 볼 미술관에 대해 우주에게 홍보했다. 이제 이 다음 시대의 그림들을 보면 우주야, 우와, 수백년간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온 과정을 볼 수 있는 거야. 재밌겠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투어의 참가자는 나와 우주 둘뿐이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여성 가이드 분은 우주에게 따뜻한 선생님같은 느낌으로 미술관 기행을 이끌어주시고자 했다. 그러나 우주는 첫 이십여 분을 버티면서 이 미술관에서 더 이상 자기가 얻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여행 최초로 강력한 항명을 했다.

"너무 미술관만 보는 거 아니에요? 우와아아아앙!"
"우주야, 아이구 울지 마... 아빠가 오늘은 미술관의 날이랬..."
"미술관의 날이라니 말도 안 돼!"


여행 앱에서 신청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투어는 세 시간 기준이다. 프리랜서 가이드 분들이 앱으로 연결돼 작품 설명을 해준다. 이분은 이분대로,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세 시간을 채워야 평판에 흠이 가지 않는다. 나와 우주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나대로, 가이드의 열정적이고 상세한 그림 설명을 열심히 들으면서 동시에 우주를 달래야 한다.

결국 나는 우주를 업었다. 우주를 달래는 말투와 가이드의 설명에 대한 반응 말투와 내용이 뒤섞이며, 나는 상당히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애 업은 관람객'이 되었다.

전시실 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마르크 샤갈의 <수탉>이 튀어나왔다. 나와 같이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던 가이드분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두 분이랑 똑같은 모습인데요? 나도 실실 웃음이 샜다. 우주야 저거 봐라, 완전 우리다. 아이고 허리야...

가이드분은 이 사진을 위해 우리가 여기 와있는 것 같다며, 그림과 우리를 함께 찍어주었다. 우아할 수 없는 아빠와 부루퉁한 아들이 인체 비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구도 속에 인정사정없이 찍혔다.
  
마르크 샤갈 <수탉> 앞에 선 아이 업은 수컷 예고없이 자화상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마르크 샤갈 <수탉> 앞에 선 아이 업은 수컷예고없이 자화상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 유종선
 
그리고 이 그림을, 전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되새길 기회가 있었다. 미디어아트 전시를 하는 파리 <빛의 아틀리에>에서 샤갈 전을 하고 있었는데, 에펠탑의 그림과 함께 샤갈의 <수탉>이 벽면 가득 떠오른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우주에게 말했다.

"우주야, 저기 봐봐. 마드리드에서 본 거 기억 나? 또 우리야, 그치?"
  
난 우주를 꼭 끌어안았다. 더 늦기 전에 아들과 이런 시간을 갖고 싶었던 나와 그런 아빠에 열심히 맞춰 다니느라 피곤한 우주. 우리의 여행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꿈결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그렇게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에펠 탑 위의 밤 하늘에 별들과 함께 떠오른 <수탉> 파리 <빛의 아틀리에> 샤갈 전에서 떠오른 이미지
에펠 탑 위의 밤 하늘에 별들과 함께 떠오른 <수탉>파리 <빛의 아틀리에> 샤갈 전에서 떠오른 이미지 ⓒ 유종선

#스페인#마드리드#프라도#티센보르네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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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출합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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