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만 해도 충분히 북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오슬로까지는 한참을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더군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하루를 쉬었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중간에는 철로에 이상이 있다며 승객들이 전부 기차에서 내려, 철도청에서 마련해 준 대체 버스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렇게 긴 여정 끝에 오슬로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나 북쪽으로 올라왔지만, 오슬로는 노르웨이의 영토 중에서도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스톡홀름이나 헬싱키도 오슬로와 비슷한 위도에 있죠. 노르웨이의 영토는 여기서 더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 북위 70도를 넘어서 끝납니다.
하지만 의외로,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통일국가를 꾸린 나라입니다. 872년 하랄 1세에 의해 노르드 왕국이 건설되었으니까요. 물론 덴마크와 스웨덴도 곧 통일국가 형성에 나서게 됩니다. 노르웨이는 주변 국가의 침입에 시달리게 되죠. 노르웨이는 오랜 기간 주변 국가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긴 내전의 시대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1380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가 사망하면서 노르웨이는 덴마크와 동군연합을 꾸리게 됩니다. 덴마크의 올라프 2세가 노르웨이의 왕을 겸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올라프 2세의 뒤에는 그의 어머니인 마르그레테가 있었습니다. 마르그레테는 곧 스웨덴까지 차지하며 스칸디나비아 전역을 지배하는 '칼마르 연합'을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마르그레테 사후 스웨덴의 반란으로 칼마르 연합은 해체됩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여전히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죠.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그 지배권이 스웨덴으로 넘어갑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은 1905년까지 계속되죠.
하지만 그 때까지, 노르웨이는 노르웨이만의 독립된 정체성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극지방에 위치한 특성상, 노르웨이는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했습니다. 통일 국가가 형성된 뒤에도 한동안은 국왕의 권위보다 지방 세력의 힘이 더 강했을 정도죠.
노르웨이의 왕위가 주변국에게 넘어가면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노르웨이의 사람들에게 코펜하겐이나 스톡홀름에 있는 '노르웨이 왕'을 따를 이유는 없었습니다. 칼마르 연합을 지나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도, 노르웨이는 별도의 의회와 법률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1905년에 이르러 노르웨이가 독립을 선택한 것도 별 어색함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노르웨이는 스웨덴의 조세나 통화 정책으로 피해를 보고 있었죠. 노르웨이 의회는 1905년 6월 7일, 만장일치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동군연합을 해체하기로 결의했습니다. 8월에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99.95%의 지지를 받기도 했죠.
다만 어색한 것은 스웨덴의 반응이었습니다. 스웨덴 안에서도 노르웨이의 독립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일각에서는 전쟁까지 불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죠. 하지만 스웨덴은 결국 협상을 택했습니다. 10월 13일, 협상 끝에 스웨덴 의회는 노르웨이의 독립을 승인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스웨덴 안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웨덴의 국왕과 갈등하고 있었죠. 이들은 국왕이라는 개인을 통한 노르웨이 지배를 처음부터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오랜 기간 다른 문화와 법률을 가지고 살아온 노르웨이를 전쟁까지 불사하며 지배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결국 노르웨이는 이렇게, 근대사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으로 투표와 평화적인 협상을 통한 독립을 맞게 됩니다.
노르웨이는 국왕을 고르는 과정도 독특했습니다. 노르웨이는 왕국이었습니다. 다만 스웨덴 왕이 노르웨이 왕을 겸하고 있을 뿐이었죠. 이제 스웨덴 왕이 노르웨이 왕을 겸직하지 않게 되었으니, 노르웨이에게는 새로운 왕이 필요했습니다.
노르웨이는 처음에는 스웨덴 왕의 아들 중 한 명을 국왕으로 모시겠다는 의사를 보였습니다. 독립은 했지만, 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우호관계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주변 유럽 국가에게, 자신들이 급진적인 혁명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줄 필요도 있었습니다. 공화정을 수립하지 않고, 왕국을 유지하기로 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고요.
하지만 스웨덴 왕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노르웨이는 덴마크에게 손을 내밀었죠. 덴마크 왕세자의 아들인 카를 공을 왕으로 모시겠다고 요청한 것입니다. 덴마크 왕실 역시 중세 노르웨이 왕실과 관련이 깊었고, 카를 공은 모계로 스웨덴 왕실과도 연결되어 있었거든요.
카를 공은 노르웨이가 독립 과정에서 보여준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고심 끝에 노르웨이의 국왕 자리를 수락했죠.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붙었습니다. 국민들이 공화정이 아닌 입헌군주정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왕의 권위는 국민들의 지지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결국 노르웨이는 다시 한 번 국민투표를 치렀습니다. 유권자의 79%가 왕정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었죠. 카를 공은 그렇게 호콘 7세로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습니다. 현재 노르웨이 국왕인 하랄 5세는 그의 손자입니다.
노르웨이는 오래된 국가입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먼저 통일국가를 꾸린 나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의 노르웨이 왕국은 1905년에야 독립한 아주 젊은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국가가 만들어지고 국왕이 선임되는 방식도 현대적이었죠. 평화적인 투표와 협상이 만들어 낸 국가였습니다.
오슬로 시청 뒤편의 항구 인근에는 노벨 평화상 기념관이 있습니다. 노벨상은 원래 스웨덴 노벨위원회에서 수상자를 결정하고, 시상식도 스톡홀름에서 열리죠. 하지만 노벨 평화상만큼은 다릅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서 수상자를 결정하고, 오슬로에서 시상식을 엽니다.
이렇게 평화상만이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것은 노벨의 유언에 따른 것입니다. 노벨이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당시는 노르웨이가 독립하기 전이었거든요. 스웨덴의 군사주의적 전통을 피하기 위함이라거나, 노르웨이 의회의 국제의회연맹 활동을 지지했다거나 하는 정도의 추측만 있을 뿐이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 노르웨이의 오슬로는 평화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노르웨이와 수도 오슬로의 탄생부터 근대사에는 보기 드문 형태의 평화가 담겨 있었으니까요.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오슬로 시청의 뒤쪽으로는 넓은 창이 나 있습니다. 평화로운 바닷가의 모습이 보입니다. 작은 공원에서 사람들은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전차 한 대가 소리를 내며 지나갑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배가 정박된 항구 근처를 돌아 보았습니다.
도시의 평화는 그렇게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라는 국가, 오슬로라는 도시와 함께 만들어진 평화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