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
기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기억은 그 사람의 전부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사건과 추억을 잊지 않고 마음 속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세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SF영화에서 AI 로봇에게 새로운 기억을 심어주면 그 로봇이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것처럼, 누군가가 자신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고유한 결을 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역으로 자신의 기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면 이 존재는 어떻게 삶을 이어 나가야 할까.
예를 들어 이번에 리뷰할 파코 로카의 〈주름〉(2022)처럼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알츠하이머로 서서히 기억을 잃게 된다면 당사자는 어떤 심정일까. 그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내가 소멸하는 것이니 당사자도 주변 사람들도 쉽지 않겠다.
오늘 소개할 작품 〈주름〉은 이런 이야기를 다룬다. 물론, 이 텍스트는 치매로 인해 기억을 전부 잃어버리는 알츠하이머 환자에 대한 이야기만을 다루진 않는다. 요양원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나이든 존재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이자 알츠하이머 환자인 전직 은행지점장 '에밀리오'에 대한 사연을 다룬다.
이 텍스트에서 요양원은 지루하고 답답한 공간으로 묘사된다. 이곳에 온 노인들은 큰 사건 없이 먹고 자는 일상을 반복한다. 요양원이라는 공간이 노인들을 더욱더 나약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처럼 생기 없는 요양원의 공간을 만화의 형식으로 잘 담아 놓는다. 그러니 독자들은 요양원이 어떤 공간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요양원에 온 노인들의 삶이 짠하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통과할 수밖에 없는 여정이 나이듦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주름〉은 우리의 미래를 적나라하게 잘 담아 놓은 텍스트라는 생각이 든다.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후안은 과거에 멋진 라디오 방송국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요양원에 온 이후로 누군가의 말만을 반복해서 말하는 광대 같은 노인이 되었다. 로사리오는 요양원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는 오리엔트 특급열차에 타고 있다고 믿으며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안토니오는 가끔씩 방문하는 손주에게 무엇이라도 주기 위해 요양원에서 얻을 수 있는 일회용 케첩이나 잼 등을 몰래 챙긴 후, 손주가 오면 선물로 주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다. 요양원 밖에 있었다면 진심으로 손주를 사랑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이런 마음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돌로레스와 모데스토는 서로 신뢰하는 부부 사이로 모데스토가 알츠하이머를 앓자 부인은 그를 돌보기 위해 요양원에 함께 오게 된다. 페이세르는 1953년 전국육상 동메달 매달리스트로 씩씩하고 건강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자 이곳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되었다. 그는 이 시절을 가장 좋은 날로 기억하고, 그날의 추억만을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펠릭스는 자신이 군인이라는 착각에 빠져 요양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경례한다. 그런데 이런 인물 중 가장 짠한 사연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부인을 넌지시 지켜보는 남편의 시선이다.
이처럼 요양원은 무엇인가 뒤틀린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간다. 〈주름〉은 과거와 현재를 오버랩하는 연출법을 통해 각각의 인물들과 사연을 짠하게 담아낸다.
우리가 〈주름〉에서 눈여겨볼 것은 요양원 안에서도 노인들의 몸 상태에 따라 구분해 놓는다는 점이다. 즉, 1층은 거동이 괜찮은 노인들이 지내고, 2층은 거동이 불가능하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노인들로 채워진다. 그래서 거동이 그나마 괜찮은 노인들은 2층에 올라가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렇게 애쓰는 인물 중 '미겔'은 노인들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담아내는 중요한 인물이다. 다른 사람보다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미겔은 노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돈을 받고 도와주는,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 돈을 모은 후, 에밀리오와 안토니오와 함께 요양원 탈출을 시도하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이렇게 낮잠이나 자고 빙고 게임이나 하면서 죽는 날만"(73) 기다릴 수 없다며 동료 노인들에게 세상을 바꾸자고 말하는 인물이다.
끝내 그는 실패하지만, 이 행위는 의미 있다. 혁명은 이뤄지지 못하지만 답답하고 지루한 요양원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노인 인구가 증가하는 동시대에 새로운 질문 거리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주름〉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노인들의 몸 상태가 좋지 않게 변한다는 점이다. 펠릭스는 코를 곤다는 이유로 동료 노인에게 큰 사고를 당하고, 금실이 좋았던 돌로레스와 모데스토 부부도 모데스토가 알츠하이머로 위독해지자 모데스토를 돌보기 위해 2층으로 함께 올라간다.
이 텍스트의 주인공 에밀리오도 마찬가지다.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옷 입는 순서도, 단추 매는 방법도, 자신이 한 행동도, 밥 먹는 방법도 모두 잃어버린다. 마음 아픈 일이다.
이 작품은 이런 짠하면서도 쓸쓸한 장면을 만화적 연출을 통해 잘 담아 놓는다. 만화가는 에밀리오가 요양원에서 가장 친했던 미겔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담아내기 위해 미겔의 얼굴선을 하나씩 지우는 연출을 사용함으로써, 에밀리오가 끝내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 과정을 성공으로 담아낸다. 이러한 장면은 치매의 아픔을 고스란히 남겨 놓는다.
파코 로카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칸과 칸의 '오버랩' 연출과 기억을 잃게 되는 인물의 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담아 놓았다. 만화가가 그리는 선이 조금 둥글지만 섬세한 붓터치로 요양원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처지와 상황을 잘 재현해 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런 연출적인 효과를 셈하면서 이 텍스트를 넘긴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조금은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 과정을 통과한다면 주변에 흔한 노인들을 조금은 더 애정 있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지우 감독의 오래전 영화 〈은교〉(2012)의 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젊고, 누구나 늙는다. 그러니 우리 주변에 있는 '주름'을 가진 존재들에게 조금은 애정 있게 바라볼 필요도 있겠다. 독자들에게 파코 로카의 〈주름〉을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 블로그에 수록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