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들 일찍 먹고 얼른 가자!"
시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며느리 이정순(가명)의 마음은 이미 오창국민학교에 가 있었다. 낮부터 마을 구장이 '오늘 오창국민학교에서 김아무개 인민재판이 있으니까 주민들은 모두 나오세요'라는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정순 집에서도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비롯해 시동생 등 5~6명이 저녁을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니 벌써 운동장에는 각 마을에서 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정순은 사람들을 비집고 연단 앞으로 갔다. 말이야 거창했지만 인민재판 법정이라는 것은 연단에 재판장 의자 하나, 책상 하나가 고작이었다.
인민재판
"지금부터 김아무개에 대한 인민재판을 실시하겠습니다."
재판장이 나무로 탁자를 세 번 내리쳤다. 재판장이 청년들에게 피고를 데려오라고 했다. "쳐 죽일 놈!" "저놈 죽여라"라는 고함이 외쳐졌다. 손이 광목천으로 묶인 채 분주소(오창지서)에서 끌려 오는 거한(巨漢)은 구름 위를 걷는 듯 비칠비칠했다.
며칠 전까지 주민들 앞에서는 물론이고 지서장 앞에서도 위풍당당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인민군이 진주하자마자 천안으로 도피해 숨어 있던 그는 누군가의 제보로 오창 분주소원들에게 붙잡혔다. 불과 열흘 사이에 얼굴이 헬쑥해진 그가 주민들 앞에 세워졌다. 재판장이 피고에 대한 인정심문을 벌였다.
곧이어 검사역할을 맡은 민청위원장이 김아무개(당시 43세)의 죄상을 열거했다.
"피고는 보도연맹원 300명을 죽게끔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여기저기서 '옳소'라는 외침이 터졌다.
"피고 김아무개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라는 재판장의 말에 참석한 주민들이 집에서 가져온 지게 작대기와 절구공이로 사정없이 그를 내리쳤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얼굴이 흑빚으로 변한 김아무개는 무수한 몰매를 맞았지만 목이 꺾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주민들 중에는 망치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 이도 있었다.
오창국민학교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잠시 후 인민재판장은 한 손을 들어 주민들을 제지했다. 그런 후에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세 발의 총성이 들린 후에야 그의 목이 꺾이었다.
지아비와 자식, 아버지의 원수인 그가 죽자 사람들은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허탈했다. 그제야 집안의 기둥이었던 망자(亡者)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창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보도연맹원 유가족들은 학교가 떠나가라 통곡을 했다.
울음은 전염되는 것인지,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던 이들뿐만이 아니라 학교 근방의 오창면 장대리 사람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오창면 소재지가 한탄과 울음바다로 변한 것은 양곡창고의 비극이 발생한 지 16일 만인 1950년 7월 27일 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 사건, 2007)
"빨갱이들을 풀어줘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김아무개는 어떤 짓을 저질렀기에 북한군 점령 시절의 인민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죽임을 당했을까? 사건의 비밀은 오창 양곡창고에 갇힌 보도연맹원들이 몰살당하기 전날 밤의 상황에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치안국과 충북도경의 지시를 받은 오창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들였을 때, 현장 통제는 6사단 19연대 헌병대가 맡았다. 진천 잣고개 전투 후 국군이 후방으로 후퇴할 때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처형하려고 하자 지역 유지들이 지서로 찾아왔다.
"군인 양반들. 이미 주동자들은 처형했고, 남은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무지렁이잖소. 제발 살려 주시오"라고 읍소했다. 7월 10일 늦은 밤이었다. 지역 유지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군 장교는 보도연맹원들을 모두 풀어 줄 경우 인민군이 남하했을 때의 혼란을 우려했다. 그래서 창고 문을 잠그고 후퇴했다. 창고 열쇠는 곽희만 오창면장이 갖고 있었다.
곽 면장은 보도연맹원을 그대로 둘 경우 잣고개에서 후퇴하는 군인들에 의해 몰살당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보도연맹원들을 풀어줄 요량으로 곽 면장이 창고 열쇠를 자물통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면장님 뭔 짓을 벌이는 겁니까!" 벼락같은 고함을 친 이는 의용소방대장 김아무개였다. '빨갱이들을 풀어줘서는 안 된다'며 곽 면장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휑하니 달아났다.
그가 이렇게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럴만한 상황이 있었다. 그는 동생 김팽식(가명)과 함께 오창 유지였다. 김아무개 형제는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로 오창의 온갖 씨름대회에서 호를 날렸다. 씨름대회에 상품으로 내건 황소는 그 형제가 독차지했다.
전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 김동수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해방 후 청주에서 만들어진 우익단체인 의열단의 단장과 단원을 맡았다. 또한 오창면 소재지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며 의용소방대장을 맡아 지역 내 기관장들과 교분을 쌓아 지서장보다 힘이 더 셌다.
반공은 애국이다?
'닭 쫓던 개' 같은 표정을 한 곽 면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지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지 몇 시간 만에 3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수도사단 군인들에 의해 몰살을 당했다.
그런 정황을 들은 보도연맹원들의 눈에 김아무개는 자신의 남편과 자식과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인식되었다. '보도연맹원들을 처리하라'는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과 군·경찰의 수뇌부, 현장 지휘(학살) 책임자가 유가족들의 눈에 보일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인근 지역인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오근장과 강서면에서는 지서장과 대한청년단장이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줬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김아무개는 왜 곽 면장으로부터 창고 열쇠를 빼앗아 가 보도연맹원 300여 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해방 후부터 정치운동을 경험한 그는 남로당과 좌익을 분쇄해 공산주의의 씨를 말리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한 민간인인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군인에 의해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학살에 적극 협조했다는 것은 생명을 경시한 반인권행위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가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오창국민학교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불법적인 일이다. 보도연맹 유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 것도 사실이다.
백곡저수지에 빠져 죽을 수밖에...
오창 양곡창고에서 탈출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집으로 돌아온 김재현(1925년생. 충북 진천군 진천면 문봉리)은 군경이 수복한 후 사석지서장의 호출을 받아 악역을 맡아야 했다.
6.25 직후 진천 할미성에서 사석지서 경찰들에게 죽임을 당한 홍백학의 아내 이순희를 붙잡아 오라는 것이다. 홍백학이야 민애청 활동을 주도적으로 해 할미성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그의 아내는 좌익활동을 한 일이 전혀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잡아 오라는 요구에 김재현은 사석지서에서 붙여준 한 명과 함께 경기도 안성방향의 입장인 이순희 친정집을 향했다. 김재현은 일제강점기에 함경남도 흥남에 장사하러 다닐 때 홍백학의 처가집을 멀리서 본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사석지서에서는 1950년 9월 말 관내의 부역자들을 붙잡아 들이느라 인력이 부족했기에 자신들이 직접 그녀를 검거하지 않고 김재현에게 악역을 맡겼다.
사석지서장은 '이순희를 붙잡아 오면 너는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너가 죽을 줄 알어!'라고 겁박을 했다. 이순희도 죄가 없지만 자신도 오창창고에서 살아나온 죄밖에 없었다. 그런 협박을 받고 보니 황당했지만 김재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석에서 입장까지 걸어서 8시간이 걸렸다. 기진맥진한 그는 어렵지 않게 이순희의 친정집을 찾을 수 있었다.
김재현은 충남 천안군 입장에서 이순희와 다른 한 명을 데리고 오다가 지그머리라는 마을에서 자게 되었는데, 한 명이 도망을 갔다. 그러자 이순희도 그에게 사석에 가기 싫다고 했다.
"당신이 안 가면 내가 백곡저수지에 빠져 죽을 수밖에..."
그녀가 다른 이의 형편을 봐줄 상황이 아니었지만, 같은 마을의 남정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안 돼 보였다. 김재현은 이순희를 진천 사석지서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는 심부름을 제대로 못 했다고 지서에서 매를 맞았다.(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물고문과 형무소
"남편 어디 갔어?"
이순희는 기가 막혔다. 6.25가 나자마자 남편을 붙잡아 간 당사자들이 적반하장격으로 남편을 '내놓으라'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남편 홍백학은 이미 1950년 6월 30일 진천군 진천면 할미성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홍백학을 죽인 사석지서 경찰들은 왜 그의 아내에게 남편 행적을 취조했을까? 그것은 자신들의 죄를 은폐시킴과 동시에 이순희에게 빨갱이 가족이라는 올가미를 씌우기 위함이었다.
사실 인공시절 집 울타리를 넘어본 적 없는 이순희가 부역혐의로 취조를 받을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의 행적을 대라는 어처구니없는 고초를 당했다.
이순희의 입에서 아무런 답변이 없자 경찰들은 물고문을 가했다. 그녀를 나무 의자에 꽁꽁 묶은 후 얼굴을 젖히더니 그 위에 수건을 덮었다. 그런 후에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그녀는 숨을 꾹 참았다. 하지만 경찰 둘이 달라붙어 한 명은 입을 벌리고 얼굴을 못 움직이게 붙잡았다.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입과 코에 주전자를 들이댔다. 잠시 후 그녀는 켁켁거리더니 의식을 잃었다. 경찰들은 당황하기는커녕 낄낄거렸다. 이미 이전부터 많이 해본 솜씨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경찰 밑에서 보조 순사로 일하면서 조선인들을 고문하는 데 심부름을 했고, 해방 후에는 빨갱이 때려잡는다고 주민들을 붙잡아다가 물고문, 전기고문을 해본 유경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죄가 있어 이순희를 붙잡아 들인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며칠간 사석지서 유치장 신세를 진 후 풀려났다. 그런데 그녀는 툭하면 사석지서에 불려갔다. 마치 동네북처럼 나라에 무슨 일만 생기면 사석지서에 끌려가 시달림을 당했다.
1957년도에는 청주형무소에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무남독녀 홍이숙(1946년생)을 남겨 둔 채 만 4년간의 감옥살이를 했다. 홍이숙은 당시 국민학교 5학년에 불과했다. 수 차례 지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어도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뜬금없이 감옥생활을 한 것이다.
1960년 4.19혁명 후 특별사면으로 이순희는 석방되었다. 석방 후 딸을 데리고 개가한 그녀는 고문 후유증으로 몇 년 후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홍이숙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김재현은 이숙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평생 간직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