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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6일, 내가 사는 동네 빛고을에선 시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문예 잔치가 열렸다. 장석 시인의 신간 시집 <그을린 고백>을 축하하는 마당이었다. 50여 명의 시민과 황지우 시인이 참석하였다. 이하의 글은 벗에게 드리는 헌사이다.
  
 장석 시인의 < 그을린 고백 >
장석 시인의 < 그을린 고백 > ⓒ 출판사 강
 
40년 동안 시를 쓰지 않은 이유

평론가 이승하는 시인 장석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은 시 애호가이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신춘문예 당선 시 중 최고의 작품은 1980년 <조선일보> 당선작인 '풍경의 꿈'이다.

"나는 한낮의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 보았다/ 더럽혀진 풀의 형상으로 천지의 낮은 중심에서 새들이 눈뜨고 있었다/ 새여/ 슬픔의 첨탑 위로 떨어지는 푸른 입술이여..."
 

또 한 명의 시 애호가가 있다. '천랑'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이다. 그는 회고한다.

"1980년 서울의 봄, 폭도의 시간으로 빠져들 때, 쫓기며 읽은 이 시 '풍경의 꿈'은 내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다. 이 시를 쓴 장석은 사라졌다. 우주의 심연 속에 닿아 있던 한 시인을 기억하고 지금도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1980년 4월의 한국 시단에는 두 명의 신예가 등장하였다. 한 사람은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다른 한 사람은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전자는 '연혁'을 쓴 나의 형 황지우 시인이고, 후자는 '풍경의 꿈'을 쓴 장석 시인이다.

1980년 4월 황지우가 시인의 월계관을 쓰고, 지인들의 축하 인사를 건네받던 수선스러웠던 봄은 '천랑'의 표현 그대로 '폭도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5월 18일 아침, 형과 나는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각자 어디론가 사라지기로 하였다. 두 아들이 어머님께 잠시의 피신을 고할 때만 하더라도, 한 달 후 성북경찰서에 끌려가 15일 간의 악형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시를 쓰지 않고선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그 개같은 세상,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형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세상에 내놓았고 김수영 상을 수상하였으며, 평론가 김현과 함께 방배동 카페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장석은 시를 쓰지 않았다. 등단하고 입대하였다. 1982년 가을, 개구리복을 입고 돌아왔으나 친구는 시를 쓰지 않았다. 왜 쓰지 않았을까?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그치나니, 내를 이루어 바다로 가노라"고 하지 않던가. 시인의 샘에 어찌 시의 새 물이 고이지 않았을 것인가?

장석은 시작(詩作)을 거부하였다. 천부적인 시재를 잉태한 청년이 시 쓰기를 거부하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시대와 시인 사이의 불화'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야만의 시대, 혁명의 시대는 이 여리디 여린 청년에겐 거칠었다. 민중을 계몽하는 시, 혁명을 선동하는 시가 아니면 모두 반동의 시로 매도당하는 시절이었다. 이 폭력적 요구 앞에서 시인은 다투느니 차라리 붓을 놓아버리기로 작정한 것 같다.

"강한 시를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1983년 어느 날부터 학교에 가는 대신 세상을 떠돌아다녔어요."

그 시절, 문예운동가를 자처하는 분들은 유달리 언사가 과격했다. 민중을 노래한다면서 반민중적인,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언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이들이 쏟아내는 거친 비평을 장석은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시인은 유랑에 들어갔다.

시인의 눈은 우수(憂愁)에 차 있었다. 시인은 말하기를 수줍어하였다. 아웃사이더가 아웃사이더인 까닭은 거친 세상과 악다귀로 싸우기엔 마음이 너무 여리기 때문이다. 그런 여린 마음으로 나는 체제의 아웃사이더로 살았고, 친구는 세상의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시인은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었다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문학이 혁명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는 소아병적 교조주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문학이 왜 투쟁의 도구가 되어야만 하는가? 문학은 삶의 목적이지 아닌가?

서울대 국문학과 77학번인 시인은 1985년 졸업장을 받고 부친이 개척한 통영바다의 '굴밭'으로 내려갔다. 바다는 시인에게 삶의 현장이었다.

40년만의 해후  
 
 장석 시인
장석 시인 ⓒ 황광우
 
 황광우 작가(왼쪽)와 장석 시인
황광우 작가(왼쪽)와 장석 시인 ⓒ 황광우
  
눈부신 청춘이었다.
그때 우리는 얼굴도
눈매도 모두 빛이었다.
잔인한 사월이라고 하는데
사월
너와 내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아크로폴리스 옆
문학과 혁명의 이데아를 논하던
사월의 그 동산은 초록의 빛이었다.

모진 세월이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무렵
전투경찰이 캠퍼스를 침공하였고
떠난다는 인사도 없이 우린 흩어졌다.

나는 양산의 육군교도소에서
빠삐용이 되었다.
오봉산 기슭 겨울바람은
늑대의 울음소리를 내며
감옥을 핥았다.

그 모진 세월을
우리는 각자의 처소에서 통과하고 있었다.
석이 그대는 바다에서
굴(oyster)을 파며 살았고
나는 망원동 지하방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 방에서
굴(cave)을 파며 살았다.

지금은 삶의 가장자리에
황혼이 찾아들고 있는 시점이다.
일제 강점 36년보다 더 먼 길을
떠돌다
우리는 만났다

석이와 나는
판검사 되는 것을 죄짓는 것으로 알았고,
교수가 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어떤가?
이루어놓은 것은 없어도 우리의 삶은 제법 괜찮지 않는가?

나는
힘이 닿는 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삶을 마감하고 싶네

저 별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를 하러 온 벗이여
그대는 못 다 읊은
노래를 불러
우리의 가난한 영혼을 위로하여 주게나.

2023년 10월 26일

벗 황광우 드림

그을린 고백

장석 (지은이), 강(2023)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지음, 문학과지성사(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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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그을린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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