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
마츠모토 타이요의 신작 <동경일일>(東京日日)(2023)은 오랜 시간 만화 편집자로 살아가던 시오자와 카즈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편집자의 삶이 무슨 이유로 이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특별한 에너지가 숨겨져 있다.
만화 편집자 시오자와는 회사에서 맡았던 잡지 <코믹 밤>이 2년 만에 폐간하게 되자 3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 그 퇴직금으로 꿈에 그리던 만화책을 출판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어떤 만화책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러한 내용은 어느 한 용사(勇士)가 험난한 장애물을 뚫고 악당이나 괴물을 처치하러 머나먼 여정을 떠나는 것과 흡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전사가 괴물을 쓰러트려야만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이고, 후자는 편집자가 자신만의 이상을 담은 만화책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오자와라는 점잖으면서도 지조 있는 편집자가 어떤 만화책을 만드는지 지켜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재 국내에 2권까지 번역이 완료된 상태여서 주인공 시오자와가 어떤 책을 구상하고 만드는지는 아직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출간된 1~2권에서도 시오자와가 지향하는 만화책을 텍스트 곳곳에 뿌려진 힌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점이 흥미로운지 모르겠다. 작품을 읽는 행위가 독자 입장에서 시오자와만의 퍼즐을 채우는 '놀이'가 되는 것이다. 이 짧은 리뷰는 그런 상상의 밑그림을 위해 쓰였다.
30년 경력 만화 편집자가 만들고 싶은 책
시오자와는 30년 경력의 베테랑 편집자이기 때문에 수많은 만화가와 작업할 수 있었다. 퇴직하기로 한 후, 오랜 시간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화가들의 '만화가'를 찾아 나선다. 1~2권에서는 타치바나 레이코(5화), 아라시야마 신(6화), 키소 카오루코(8화), 니시오카 마코토(10화), 이이다바시 마치코(13화) 등의 만화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절박하게 만화를 그렸다는 사실이다. 독자의 인기를 의식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로 만화를 짓고자 애썼다.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하기도 했지만, 죽을 각오로 만화를 그렸다.
동시대는 붓과 펜으로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들은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며 작품을 이어나간다. 이 지점은 만화가 웹으로 전환되는 매체 전환 시대의 분위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 지점에서 시오자와가 꿈꾸는 만화책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단순한 만화가 아닌 영혼이 담긴 만화가의 '만화'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만화책을 예술만화라고 부를 수 있지만 예술만화로 국한하기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긍지 있게 밀고 나갈 수 있는 만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앞으로 <동경일일>이 계속해서 번역된다면 조금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시오자와의 만화책을 예측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편집자인 하야시 리리코다. 시오자와가 퇴직하게 될 때, 그의 직무를 대신 맡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카즈오가 담당했던 신인 만화가 '아오키'를 대신 맡는 인물이다.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품고 있어서다.
즉, 리리코의 삶이 시오자와의 과거 모습을 대신 설명해 주고 있다. 시오자와가 힘들어하는 리리코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근심은 현역이어서 할 수 있는 고민"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래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자신의 과거 모습과 겹친다고 볼 수 있고, 이런 서사는 <동경일일>을 횡단하는 하나의 긴 줄기이다.
역으로 리리코가 담당하는 철부지이자 열정적인 만화가 아오키의 모습은 시오자와가 현재 찾아다니고 있는 만화가들의 과거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차이가 있겠지만, 마츠모토 타이요는 이런 인물을 통해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중첩해 놓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과거의 편집자와 동시대의 편집자를 교차하는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시오자와와 같은 훌륭한 편집자를 작가 입장에서 또다시 만나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이것은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가능성과 재능을 이끌어주는 사람
이 텍스트에서 편집자 시오자와가 어떤 인물인지 이야기해야겠다.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무래도 온 힘을 다해 만화를 그렸던, 타치바나 레이코 선생과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이 장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레이코 선생의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오자와가 그녀의 작업실에 방문해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때문이다.
젊은 시절 레이코는 만화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큰 병을 얻어 현재 작업하고 있는 것을 멈추고 싶었다. 그렇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인물이다. 아무래도 원하지 않은 작품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던 날, 편집자인 시오자와는 자신이 입던 웃옷을 벗어서 둘둘 말아 레이코에게 받은 원고를 보호한다. 그는 몸이 젖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원고만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장면을 본 레이코는 팔리지 않더라도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그리겠다"고 다짐한다. 즉, 시오자와라는 편집자는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고마운 인물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의 가능성과 재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뮤즈를 만나는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니 귀중한 경험이지 않겠는가.
시오자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만화가들의 '만화가'는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시오자와와의 만남 이후, 다시 용기 내 열정적으로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이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무엇인가 치유되는 듯도 하고, 예술가로서 하던 작업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이런 편집자가 존재한다면 새로운 것을 맹목적으로 좇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편집자를 꿈꾸는 예비 편집자들과 예술가들에게 이 텍스트를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