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셨다면서요. 대단하시네요. 애들 네 명 키우는 것도 힘드실 텐데... 언제 쓰셨대요?"
평소 부딪힐 일 없던 회사 동료가 쉬는 시간에 찾아와 말을 건넸다. 이제는 제법 시간이 흐른 터라 대답하는데 잠시 버퍼링이 생겼다.
"....아닙니다. 대단한 거... 그리고 힘들면 쓰게 됩니다."
정말 힘들어서 쓴 글이다. 주식 투자로 심란했던 어느 날, 나는 왜 이러나 싶어 끼적끼적 적어 나간 것이 책이 되어버렸다. '대단해서'라기 보단 '못나서'라는 게 더 적절하다는 생각에 몇몇 글에서는 '못나서 나온 책'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동료가 해준 한 마디.
"그래도 그 많은 글을 다 쓰신 거잖아요."
아,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랬구나. 아니, 그렇지. 내가 다 썼지. 거기다 부족해 보이는 글을 보필하고자 그림까지 그리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투자에선 꽤 긴 기간 못난 모습을 보였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그런대로 괜찮은 생활을 한 것 같아 위안이 됐다. 아... 이 친구는 어쩌자고...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빚을 내준 게 있다면 탕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기함, 놀라움, 의아함... 사람들이 보여준 갖가지 반응의 말미에는 언제나 어떻게 썼냐는 의문이 있었다. 네 아이 육아에 직장생활까지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는 질문에 대답은 한결 같았다.
"힘들면 쓰게 됩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지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회로부터 원치 않는 강요를 받는다. 말하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는 멍에와 상처들은 쌓이고 쌓여 결국 빙의를 통해 하고픈 말을 전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정신착란. 그녀의 방어 본능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김지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를 상담했던 의사가 던졌던,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자신을 찾는 일. 그녀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일이었을 테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그녀. 비록 나는 스스로를 힘들게 만든 케이스였지만, 나 역시도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한 주식투자에서 큰 대가를 치렀고 놓쳐버린 기회에 매일같이 후회하던 나날이었다. 출근하는 발길은 나무토막 같았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와중에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손실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수천만 원을 잃고 나니 한때 부모님 용돈을 10만 원 더 드릴지 말지 따위를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 한스러웠고 몇 만 원 아끼자고 아내가 원하는 식당에 가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체기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나를 향해 방긋 웃으며 최고라고 엄지를 들어 올려주는 네 아이를 마주할 때면 자괴감이 최고치를 찍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게 만든 게 글쓰기였다. 쓰면서 반성했고 쓴 글을 읽으면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마음과 주식 계좌에 새겨진 짙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할 수 있었다. 그 후부턴 모든 어려움에 글쓰기가 함께했다.
"책 내면 인세 나오지 않나요? 얼마나 버셨어요?"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던 동료는 가슴 아픈 질문으로 잔잔한 물결을 쓰나미로 바꿔버렸다. 어? 어디 가? 없던 빚도 탕감해주고 싶던 마음이 저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기합리화적 안도와 보람에서 벗어나 다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글쓰기는 돈벌이가 아닌 내 삶을 좀 더 잘 살기 위한 과업에 가깝다. 가끔 원고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예정되지 않은 돈이다. 실질적으로 글에 대한 대가는 지극히 불확실하다.
유튜브 출연을 위해 몇 차례 연차를 쓰고 왕복 10시간 운전으로 서울을 다녀온 것만 해도 책 계약금은 우습게 넘어간다. 출판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보려 자비를 들여 SNS 광고를 집행하고 바이럴 마케팅을 위해 SNS 컨텐츠를 만들었던 그 모든 비용과 수고를 생각하면, 이건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착실히 쓰기 위해 글을 썼다고 봐도 무방했다.
쓰면서 즐겁기도 했고 보람도 느꼈지만, 하얀 벽지를 바라보고만 있던 그 많은 시간을 생각하면 단순히 계산 해봐도 물질적으로 남는 건 글뿐이다. 아직까진 돈벌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꽤나 진지한 유희이자 취미다. 모든 유희와 취미가 그렇듯 삶을 조금 더 매끄럽게 해주는 윤활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마 돈벌이로 글을 썼다면 진즉에 지쳐서 그만 두었을 일. 글쓰기를 '직'이 아닌 '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고 있다.
나이 들어서까지 질리지 않고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 돈을 세는 것과 쓰는 것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고 돈을 벌어 돈까지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그래서 적어도 마음만 먹으면 즐길 수 있는 '쓰는 일' 하나만큼은 놓지 않을 심산이다.
지이잉 지이잉. 글 하나가 또 프린터에서 배꼼 고개를 내민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 중 하나가 다 쓴 글을 출력하는 소리라고 착각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평생 지속하겠다는 다짐이 결실을 맺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