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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최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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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선생은 출옥 후 삼엄한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천도교가 근대적 종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단정비와 천도교 민족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의암 손병희의 사망 이후 분열되는 교단을 수습하면서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그리고 멸왜기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민족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주석 1)

제3대 교주 손병희가 1922년 5월 19일 옥고와 고문 후유증으로 눈을 감았다. 향년 62세였다. 그의 서거 이후 교단의 분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천도교는 1922년 종헌과 교헌 개정 등을 통하여 이미 전통적인 교주제를 없애고 민주적인 종리원 합의제로 교단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단을 장악한 최린 계열이 천도교의 기념일을 정비하면서 박인호의 승통기념일을 제외해 버리자 오영창 등이 강력 반발하면서 교주제 부활을 주장하는 등 최린 계열과 대립했다. 이 일을 계기로 천도교는 1925년 두 개의 신구파 종리원이 생기는 등 심각한 분열을 맞았다. (주석 2)

3.1혁명 당시 큰 역할을 하고 민족대표에 이름을 올렸던 최린은 곧 변절하고 자신이 속했던 천도교의 분열을 획책하였다. 

조선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이 1926년 4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인산일인 6월 10일을 기해 천도교는 대대적인 시위를 준비하였다.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3.1혁명의 정신을 잇는 것과, 김성수·이광수·최린 등이 이른바 자치운동을 모색하자 이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 천도교의 목표는 절대독립에 있었다. 

천도교 구파의 영수인 박인호는 천도교 구파의 원로인 이종린·권동진·천도교청년동맹의 간부인 박래홍·박대원 등과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는 1925~6년 일제의 자치권 부여 소문과 함께 김성수·이광수·최린 등의 민족주의 우파들이 자치운동을 모색하자, 사회주의세력과 제휴하여 3.1운동과 같은 일대 시위를 벌임으로써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전략이었다. (주석 3)
1921년에 지어 졌다하니 근대 건축물이다. 시대를 밝히듯 빨간 벽돌이 인상적이다.
▲ 옛 천도교 중앙총부 건물 1921년에 지어 졌다하니 근대 건축물이다. 시대를 밝히듯 빨간 벽돌이 인상적이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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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은 500~600명의 학생들이 참가하여 서울에서 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청년동맹원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독립선언문 10만 장을 인쇄하였다. 일제는 8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막고 수 백 명을 구속했다. 총독부는 천도교 기관 및 관계 인사들을 검색하고 청년회원 명부 등을 압수했으며 이들의 자택까지 점찍었다.

춘암은 청년시절 손병희와 함께 동학에 입도한 이래 갑진개화혁신운동·민족문화운동·3.1혁명·기독교·불교·사회주의세력과 연합하여 총독부가 사주한 이른바 민족개량주의에 반대하는 신간회를 창립한 것이다.

신간회는 "우리는 기회주의를 모두 부인한다"는 기치 아래 나라 안팎에 149개의 지회가 결성되었으며 회원이 4만 여 명에 이르렀다. 조선인에 대한 착취기관 철폐, 일본인의 조선 이민반대, 사상연구의 자유보장, 식민지 교육정책반대 등을 주장하면서 노동파업·소작쟁의·동맹휴학 등을 지도했다. 사실상 항일구국투쟁에 나선 것이다.

천도교(구파)가 비타협 민족주의세력 및 사회주의세력과 연대하여 신간회를 조직하고 일제에 저항하게 된 것은 당시 구파의 영수였던 춘암 박인호의 내락·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그의 양자인 박래홍과 구파의 원로 권동진·이종린이 신간회 발기에 참가한 것을 비롯 규칙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창립시 권동진은 부회장, 박래홍과 이종린이 간사를 맡아 신간회를 운영하였다. 

천도교 도인(구파계열)들은 전국 각지에서 신간회 지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민중대회'를 열려다 간부 40여 명이 체포되고, 이후 민족개량주의 세력이 본부를 장악하고 대일 타협노선으로 기울자 해소론이 제기되면서 천도교는 여기서 발을 뺏다.

"박인호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사람이었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거시적인 안목과 뛰어난 상황판단으로 고비 때마다 큰일을 해냈으며 교계의 큰 희망적 인물이었다." (주석 4)


주석
1> 임형진, <1920년대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박인호>.
2> 임형진, 앞의 글
3> 1915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3월, 박인호선생〉, 광복회
4> 박성묵,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춘암 박인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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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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