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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가 낳은 대학자 정병욱 선생을 아십니까? 정병욱 선생은 1922년 설천 문항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정병욱 선생의 부친 정남섭 지사는 3.1독립운동에 참가해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의 가족은 정병욱 선생이 7세 때인 1927년, 부친 정남섭 지사가 하동으로 교원 발령이 나자 하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뒤 1934년 부친이 양조사업을 하기 위해 광양 진월의 망덕포구로 집을 옮기자 또 한 번 터를 옮겼습니다.

정병욱 선생은 민족시인 윤동주의 벗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건네준 시집 원고를 간직하다 1948년 지인들과 함께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습니다. 정병욱 선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주옥같은 윤동주의 시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 원고를 숨겨 두었던 광양 망덕포구의 정병욱 박사의 본가는 2007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됐으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그가 태어난 설천 문항마을에는 정 박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윤동주의 벗이자 학자로서도 큰 업적을 남긴 정병욱 선생 이야기를 4회에 걸쳐 다룹니다. - 기자 말

① 윤동주의 벗 정병욱
② 학자 정병욱 선생
③ 망덕포구와 설천 문항
④ 정병욱을 기리는 사람들


윤동주, 정병욱을 찾아오다

정병욱 저작 전집 7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의 '잊지 못할 윤동주 형'편과 후손들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만남은 정병욱 선생이 연희전문학교를 입학한 1940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문학청년들의 작품을 싣는 지면이 있었는데, 이 지면에 실린 정병욱 선생의 글을 보고 3학년이던 윤동주가 그가 머물던 기숙사 방을 찾아온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같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연희 숲과 서강 들을 거닐고, 시내 마실도 다니곤 했는데 이때부터 문학청년으로서의 동행이 시작됐다. 둘은 기숙사 생활을 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나와 하숙을 하게 됐는데 줄곧 같은 집에서 하숙을 했다. 이렇게 2년 가까이 청년 학창 시절을 단짝으로 지내며 영향을 받고 민족의식, 문학의식을 공유했다. 

정병욱 선생은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친필 원고를 보존하고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동기 강처중, 동생 윤일주가 가지고 있던 유고를 모아 함께 시집을 간행했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1941년 말쯤 그동안 모은 자선 원고를 시집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민족의식이 담긴 시집 출간으로 고초를 겪을 것을 염려한 스승 이양하 교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권의 원고를 만들어 한 권은 자신이 보관하고 한 권은 이양하 교수에게, 또 다른 한 권은 정병욱에게 건넨다. 

이후 1942년 학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다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순절한다.

1944년 1월 일제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정병욱은 광양 망덕포구에 있는 본가의 모친에게 윤동주 자선 원고를 맡기면서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니 잘 간직해 달라'라고 당부하고 전장으로 떠났다. 정병욱의 부모는 윤동주의 원고를 항아리에 담아 마루 밑에 숨긴다.

해방이 된 후 정병욱은 그 원고를 찾아 강처중, 윤일주 등과 함께 유고시 31편을 묶어 1948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게 된다. 한글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려 했던 일제말의 탄압 속에서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공로자인 것이다. 

"가장 가장스러운 일은 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

정병욱 선생은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이란 글에서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알리도록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고 회고했다. 여동생 정덕희는 "큰오빠(정병욱)는 학병에 나가서 그동안 집에 없었으니까 잘 몰라서 어머니가 그걸 장롱 속에 감추었다가 주신 걸로 안 거지요. 실은 마루 밑에 감추었다"고 증언했다. 

정병욱과 윤동주는 사돈지간이다. 윤동주가 요절한 지 10여 년 뒤 정병욱의 여동생 정덕희와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윤동주에 대한 정병욱의 그리움이 사무치게 와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병욱 선생의 아호 백영(白影)은 윤동주의 시 '흰그림자'와 닿아있다. 벗 윤동주의 시를 보존하고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게 되는데 헌신했던 그가 자신의 아호를 백영(白影)이라 부르며 윤동주가 우리 민족(白衣民族)의 모습으로 그리던 '흰그림자'를 평생 기억하고자 했다고 한다.

정병욱 선생은 윤동주 회고 글에서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해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윤동주#국문학자 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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