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공단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홍보하고 가는 중이에요.'
지난 5월, 공계진(66)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을 경기도 안산의 시화노동정책연구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늦을까 봐 서둘렀더니 약속 시간인 1시보다 20분 일찍 도착했다. 연구소 문은 잠겨 있었다. 12시 55분에 위와 같은 문자가 왔다. 식사 시간이 길어지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화 공단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홍보 활동을 한 것이다.
"시화공단에는 2001년에 왔어요. 제가 금속노조 전신인 금속산업연맹에서 정책실장을 하고 산별로 전환하는 일을 2000년 초부터 2001년 2월까지 했거든요. 금속노조가 만들어진 다음에 그만두고 여기로 왔어요. 벌써 20년이 넘었네요. 중간에 민주노동당에도 있었고,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장도 했고요."
시화공단은 노동조합을 경험한 적 없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는 DMZ 같은 지역이다. 노조를 만들면 무엇이 좋은지 모르고, 노조를 만들어서 승리한 걸 본 적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노조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만 접하다 보니 노조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조를 만들어봤자 깨질 수밖에 없다면서 체념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몇 해 전 시화공단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회사에서 억울한 일이 생기면 누구를 찾아가냐는 질문에 대부분이 회사 관리자를 꼽았다. 노조나 정당을 찾는다는 사람은 0.4% 정도에 그쳤다. 그곳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이 공계진이다.
시화공단에는 1만여 개의 공장이 있고, 그곳에서 1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1만여 개 공장들의 99%는 50명 이하의 작은 공장들이다. 1만여 개의 공장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시화공단에 6월 초부터 점심시간에 커피 트럭이 온단다. 금속노조 일반분회가 2024년 1월에 후원주점을 통해 마련한 트럭이다.
"연구소에서 시화공단 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 5만 원짜리 상품권을 준다고 할 때는 호응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커피 트럭 앞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줄 서서 커피를 받아 갔어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다가가면 '노동조합은 빨간 띠 두르고 투쟁이나 외치는 곳'이라는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
공계진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다. 또래보다 1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도 몸이 안 좋아서 1년 동안 휴학을 했고, 대학교는 재수해서 들어갔다. 80년도에 고려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해다. 교정은 최루탄 냄새로 가득했고, 매일 시위가 이어졌다. 이런 시대에 무언가 해야 한다며 방법을 찾고 있던 그에게 불교학생회가 눈에 띄었다.
"수업 시간에 한 친구가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을 보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에게 나도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불교학생회'를 알려줬어요. 당시 불교학생회는 종교모임 서클에서 이념 서클로 바뀌는 과정이었어요. 거기서 79학번 선배들을 만나 학습을 시작했고, 얼마 뒤엔 지하 서클에 가입해 사회과학 책을 읽고 데모를 공모(?)했어요."
그가 4학년이던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학내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공시위를 했다. 공계진을 비롯해 몇몇 친구들이 치고 나가고 후배들이 그때를 틈타 교문 밖으로 나가는 계획을 세웠다. 공계진은 시계탑에서 치고 나가기로 했고, 다른 친구는 사범대 건물에서 치고 나가기로 했다. 공계진은 다리가 불편했기에 치고 나가지는 못했다. 대신에 건물에 몸을 묶고 버틸 생각이었다. 시계탑에 몸을 묶었다. 10분 만에 경찰에게 잡혔다.
치고 나가기로 한 친구들 역시 구호 한 번 제대로 못 외치고 학내에 상주하던 형사들한테 잡혔다. 그 일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높은 형량이었다. 당시에는 형량이 높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구치소에 갇혔다. 다행히 그해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되자마자 갈림길에 섰다. 대학에 복학해 민주화운동을 이어가자는 '복학파'와 사회로 나가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는 '반복파'의 논쟁이 벌어졌다.
"저는 당시에 사회로 나가 노동운동을 하자는 이른바 '반복파'였어요. 그렇게 마음을 먹고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했어요. 솔직히 고민이 많았어요. 노동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장애가 있는데 공장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 친구한테 그런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운동한다는 놈이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맞았어요. 해보지도 않고 못 한다는 건 운동가의 자세가 아니지요. 공장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공장에 취업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리가 불편하니 면접은커녕 공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문 경비원들에게 잡혔다. 그렇게 좌절을 거듭하고 있을 때 당시 속해 있던 조직에서 구로에 있는 봉제공장 부흥사에 '꼭 입사해야 한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떻게 해서든 입사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부흥사로 향했어요. 재단, 봉제, 아이롱(다리미) 가운데 아이롱 업무를 하는 곳으로 들어갔어요. 공장에 찾아갔는데 처음엔 경비실에서 쫓겨났어요. '당신은 이런 데서 일하기 힘드니까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세탁소에 가서 아이롱 업무에 대한 얘기를 듣고 다음 날 또 갔어요. 한 번도 아이롱 업무를 해본 적 없는 '쌩초짜'였는데 '수년간 아이롱 업무를 해왔고, 팔 힘도 강해서 자신 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제야 경비실에서 들어가라고 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관리자를 만나 면접을 봤다. 관리자는 공계진을 보자마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가라'고 했다. 그래도 일할 수 있다고 계속 사정을 하자 관리자는 '일을 못 한다고 판정될 시 자진 퇴사해야 한다'는 각서를 쓰라고 했다. 결국 각서를 쓴 뒤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 가정용 다리미를 만져본 게 전부인 그가 공업용 스팀다리미를 사용해서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다림질이 익숙하지 않아서 금방 정체가 들통날 줄 알았다. 부서에 배치되었으니 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도와주었다. 공계진을 딱 보면 거짓말하고 들어온 줄 알았을 텐데, 티 내지 않고 도와주었다. 처음 한 달은 너무 힘들었다. 각서까지 쓰고 들어왔기 때문에 잔업도 일부러 했다. 안 그래도 장애가 있는 다리인데 오래 서 있다 보니 더 아팠다. 걷기도 힘들었다.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면 퇴근하고 술 한잔도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집으로 바로 갔다. 3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렇게 힘든 일을 견딜 수 있었던 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는 이유
"제 삶의 신조는 잘못된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나한테 피해 주는 사람에겐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어렸을 때, 저에게 장애가 있다고 놀리고 저를 괴롭힌 아이들은 저한테 다 맞았어요. 안 맞은 아이들이 없어요(웃음)."
어렸을 때는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 나이 들수록 몸은 퇴화하고 장애는 진행형이니 점점 걷기가 힘들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지팡이도 짚지 않았다. 지금은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그렇다고 주눅들어 살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 그의 옆에서 어깨동무 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 때문에 겪는 불편함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장애가 있어도 장애를 부정하고 살았어요. 장애가 있어도 비장애인하고 경쟁했고 그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를 놀리는 친구들을 두들겨 패고 그랬어요(웃음). 장애인하고 안 놀고 비장애인하고 놀았어요. 왕초 노릇도 하고 회장도 하고요. 장애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장애인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공계진이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안산에서 서울에 있는 금속노조(중구 정동)로 출퇴근하면서부터다.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역사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어도 반은 계단으로 오르거나 내려갔다. 리프트(휠체어를 탄 채 이동하는 기구)를 탈 때도 있었는데, 리프트를 타면 '삐삐삐삐~' 하는 소리를 내면서 올라가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았다.
"리프트를 타고 이동하면 제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리프트는 안 탔어요. 몸으로 불편함을 느끼고부터는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그동안 장애인 운동을 안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어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처럼 열심히 싸우는 장애인 단체 덕분에 나는 정말 편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마디로 저는 귀족(?) 장애인이었어요(웃음)."
공계진은 현재 시흥의 두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다. 말로는 소장을 못 구해서 본인이 맡았다고 하지만 그동안 장애인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미안한 마음이 커서다. 소장을 맡았어도 상근직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월요일에는 두리센터로 출근을 하고 화요일엔 시화노동정책연구소로 출근한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시흥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실습을 하러 간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 일과다. 퇴직 나이도 훨씬 지났는데 뒤늦게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가정을 꾸려놓고 사회를 바꾸는 일을 한다고 가족을 돌보지 않았어요. 돈 벌어오지 않는 가장이었죠. 가족은 뒷전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았는데 다 늙어서 가족에게 의존하면 가족이 좋아하겠어요? 그건 평생 가족을 괴롭히는 일이죠.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시골에 모여서 노후를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모이는 형태는 다양해요. 한집에 여럿이 살 수도 있고, 따로따로 살면서 마을을 만들 수도 있어요. 시골에 내려가서 거주하는 귀촌이 아니라, '노인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공동체 만들 때 자격증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준비하는 거예요.
운동했던 친구들은 다들 꼴통이라서 만나면 맨날 싸워요. 그래도 늙어서 가족에게 의존하며 사는 것보다는 사회 변화를 꿈꿨던 그때처럼 옥신각신 하면서 살면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도 이러한 뜻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젊었을 때 가족을 돌보지 않았는데 내 몸이 늙고 병들었다고 가족에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럴 바에야 요양원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낫다. 이왕이면 한때 치열하게 살았던 친구들이랑 노후를 보내고 싶다. 노인공동체 만드는 것을 꿈꾸는 이유다.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해요"
나이 들면 관계는 점점 좁아진다. 그동안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물리적 심리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점잖은 척, 마음 넓은 척, 다 받아주는 척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다. 공계진은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관계는 더 좁혀질 테니 꼬장꼬장하게 살기로 했다. 인터뷰를 하던 공계진이 갑자기 연구소 한쪽 벽에 붙어 있는 통나무 판자를 가리켰다. 가로 1.5미터, 세로 30센티 크기의 판자에는 "열심히 살자"라고 쓰였다.
"저게 내 삶의 모토예요. 살다 보면 좌절도 많이 하고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겪어요. 운동하는 삶은 더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바뀐 것은 사실이잖아요. 싸우면 바뀐다는 믿음이 있어요.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해요. 아까 내가 한 말 중에 '나를 건드리는 사람에겐 반드시 복수한다'고 했지요. 나를 건드렸을 때 복수하겠다는 마음 없이 지쳐서 나가떨어진다면 변화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다시 털고 일어났어요. 일어나서 싸웠어요. 특별히 힘들었을 때는 별로 없었어요. 제가 ESTP에요. 똘끼가 충만한 성격이죠(웃음)."
ESTP가 어떤 유형인지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똘끼가 충만하다"라고 한 것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행동대장, 팩트 폭격기, 일 중독자, 사감 선생님, 바른생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음나눔유니온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