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선까지도 차오르니까 조심해요."
지난 9일, 그라운드 골프를 치던 어르신들이 비설거지(비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덮거나 정리하는 일)를 하려고 차를 몰고 내려왔다. 움막 안에 있던 집기들과 골프채, 시계까지 알뜰하게 다 정리하면서 "작년에도 물이 찼다"고, "저 회색선까지 찼으니 얼른 올라오라"고 한다.
같이 짐을 정리했다. 천막농성장 바로 위쪽에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며갈 때 자주 마주치는 분들인데, 말을 섞지는 않았었다. 어떤 때는 아웅다웅했고, 농성장을 응원하는 분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 지낸 이웃이라 치울 때 같이 치우고 서로의 안전을 걱정한다. 수박도 잘라주며 "이게 맛있는 거"라고 하면서 하나씩 쥐어쥔다. 재난 앞에는 모두 이웃이다.
그라운드 골프장에 있던 평상을 금강스포츠공원 주차장과 인접한 둔치 위쪽으로 올리고 내내 골프장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다가 저녁에야 일어났다. 3선으로 물러난 농성텐트 바로 옆이니, 이제 진짜 이웃이 됐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비가 많이 오지 않기를, 우리 이웃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다 같았다.
강은 무섭게 불어났다… 보가 홍수위를 높이는 지장물
강에 천막을 치고 70일 넘도록 지내면서 다리 많이 달린 곤충들을 보고 가끔 놀랄 때가 있었지만 무섭거나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의 상황을 보니 자연이 제일 무섭고 두렵다. 비와 더위, 바람은 사람이 이길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것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물이 무섭게 불어 그라운드 골프장까지 차올랐다. 세종보 수력발전소도 상투만 남긴 채 물에 잠겼다. 그 옆의 자전거길도 잠겨, 통제선이 쳐졌다. 물이 이 정도만 차올라도 세종보가 홍수를 유발하는 지장물이라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정보와 수력발전소가 물의 흐름을 가로막고 수위를 상승시키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세종보가 없었다면 그라운드 골프장은 잠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주보의 경우, 작년 홍수시 해발고도 19미터까지 물이 차올랐다. 공주보 물을 가득 채우면 해발고도 8미터까지 채우는데 그 수위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공주보의 수문은 위로 거대한 판을 들어올리는 방식인데, 이럴 경우 물속 아래는 고정보가 막고, 위쪽은 가동보가 막고 있는 형국이 된다. 결국 물길을 다 막아놓고 홍수를 예방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피난하는 곤충들… 수문 닫으면 강의 생명이 이재민
"벌레들도 피난 가나봐."
그라운드 골프장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부쩍 벌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땅속에서 솟아난 벌레들의 대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짐을 옮기는 활동가들의 몸에 달라붙고, 간의의자 등을 털어보면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 와중에 인근 제방에서는 제초작업에 한창이다. 지금 제초작업이 필요한 때인가 싶은데 이 때문에 벌레들이 더 갈 곳을 잃기도 했다.
새들도 거세게 흐르는 강물에 떠다니는 짚풀 위에서 쉬면서 잠시 머물 곳을 찾느라 부산하게 강변을 오가고 있다. 강의 생명들도 장마를 겪는 이재민 신세가 되었다.
장맛비로 차오른 강은 물이 빠지고 수변이 드러나면 다시 고라니, 오리, 벌레들의 삶터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세종보 수문이 닫혀 장기간 담수하면 강의 친구들은 계속 이재민 신세가 되어야 한다. 거기다 '탄력운영' 한다고 물을 채우고 빼는 일을 반복하면 결국 많은 생명들이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죽게 될 수도 있다. 야생동물들에게 '탄력운영'은 물을 뺀 뒤에 몰려드는 생명체들을 반복적으로 수장시키는 일의 무한 반복인 셈이다.
"딱~ 딱~"
비가 많이 왔다고 재난안전문자가 새벽에도 몇 번이나 울리는데, 8일 새벽 5시에도 어김없이 그라운드 골프장에서 공치는 소리가 들렸다. 농성천막 강제철거를 요구했던 세종시 공무원들에게 "안전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농성텐트는 신경 쓰지 말고, 다른 분들의 안전을 챙기라"고 말하면 "안전문자를 날렸다", "고지했다"라고 대꾸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을 돌보는 것,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눈앞에서 자주 목격한다.
사실 농성장은 시시각각 대청댐 방류상황 등을 살피며 수위를 체크하고 있다. 수자원공사와 소방서 관계자들도 자주 들러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간다. 하지만 강변에 천막을 칠 때는 세종보 수문이 닫히는 것을 수중농성을 해서라도 막겠다는 각오를 했다. 우리가 실제로 조심해야 하는 건 금강이 죽고 결국 강 전체가 죽는 상황이다.
지역의 어르신 한 분이 걱정돼서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잠시 안부를 확인하고는 "미안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남긴 채 뒷모습을 보였다. 내 마음도 당신들과 같다는 뜻이고, 함께 농성을 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뜻이다.
그 묵언의 방문이 건네는 위로와 연대의 말이 계속 농성장 주변에 쌓여가고 있다. 그 발길이 금강을 살리는 소중한 희망의 씨앗이다. 최근에는 말을 건네는 세종시민들도 생기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시민들도 있다. 이렇듯 세종시민과 농성장의 거리가 좁아진다면, 무소불위의 권력도 세종보를 함부로 닫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고, 농성장이 잠겨도 이런 마음들은 침몰하지 않는다. 4월 30일에 하천부지에 친 1선 녹색천막에서 나와, 10여 미터 위쪽의 둔치에 친 2선 텐트도 3선인 주차장 쪽으로 물렸다. 하지만 우리는 물러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애타게 바라보는 세종시민들과 함께 세종보 앞으로 한발씩 전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