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퇴근하고 돌아와 냉동실에 있던 대패삼겹살을 꺼냈는데, 꽝꽝 얼어있어야 할 고기가 살짝 녹아있었다. 아이들 중 누군가가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거나 잠시 정전이 됐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30분 뒤에 운동을 가야 했기에 서둘러 저녁을 차려놓고 집을 나왔다.
1시간 동안 열심히 운동을 하고 휴대폰을 보니, 남편에게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었다. 밥을 먹으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거나 코를 고는 게 코스인 사람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전화를 걸었다.
"냉장고 고장 났어. 둔해가지고, 그것도 몰랐어?"
여기서 남편의 말이 끝났다면 나는 매우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내가 드라이아이스 한 박스 사다가 넣어놨어."
드라이아이스를 파는 가게를 검색해서 찾아가 한 박스나 사다가 냉장, 냉동실에 골고루 넣어뒀단다.
"정말? 난 고장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자기가 똑똑하게 잘 처리했네. 고마워."
산 지 4년밖에 안 된 냉장고가 고장이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냉장고는 24시간 가동되긴 하지만 세탁기나 건조기 같은 활동적(?)인 가전제품에 비하면 매우 움직임이 적은 편이라 쉽게 고장이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신혼 때 산 냉장고의 경우, 그 당시 유행했던 와인색에 꽃무늬 외관이 나중에는 너무나 촌스러워 보여 바꾸고 싶었음에도 10년 넘게 고장이 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 일찍,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일정이 밀려 당일 방문은 어렵고, 주말에는 업무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눈앞이 캄캄했다. 한여름에 냉장고 없이 앞으로 사흘을 어찌 버틴단 말인가!
남편이 드라이아이스를 넉넉히 사다 넣은 덕분에 토요일 밤까지는 버틸 수 있었으나, 일요일이 되자 냉장고 안에 물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이 냉장고 외에 김치 냉장고가 있긴 한데 매우 작은 사이즈다. 김장철이 아니라서 김치가 꽉 차 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여유 공간에 냉장식품 일부를 옮겨 넣었다. 냉동실에 냉동식품보다는 멸치나 정체불명(?)의 가루 같은 건조식품이 대부분인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냉장고 고장 나흘째 날에 수리 기사가 왔다. 냉장고 뒤쪽에 먼지가 많이 껴서 작동이 안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며 먼지를 제거하고 갔다. 한두 시간 뒤에도 안 되면 다시 오겠다면서.
두 시간이 지났지만 냉장고는 살아나지 않았다. 수리 기사가 다시 와서 10분 정도 머물며 냉장고 상태를 체크해서 본사에 '콤프레셔 고장'으로 접수를 했다. 내가 산 제품은 콤프레셔 10년 무상 보증 제품이었다.
다음날 수리 기사가 콤프레셔를 교체하러 다시 방문할 거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수리가 불가능해 교환으로 진행을 해야 하며, 구매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영수증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수증을 찾으려고 그동안 이용했던 쇼핑몰을 뒤져봤지만 구매 내역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과 둘이서 최저가로 산다고 여기저기 검색해서 산 건 기억이 나는데 몇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기억이 가물가물 했다. 카드 사용 내역과 메일함까지 몇 시간을 뒤진 끝에 겨우 영수증을 찾아 보냈고, 이틀 뒤에 새 냉장고를 받았다. 냉장고가 고장난지 딱 일주일 만이었다.
새 냉장고를 들고 온 배송 기사님께 여쭤봤다.
"고장난 냉장고는 폐기처분 하나요?"
"네."
"콤프레셔만 갈면 되는데, 왜 굳이 교환을 해주나요?"
"아마 비용 때문이겠죠. 부품 창고 관리하고 서비스 기사 쓰는데 드는 비용보다 교환 비용이 더 적게 든다 판단한 거죠."
내가 뜻한 건 아니었지만 지구에 커다란 쓰레기 하나를 버리게 됐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폐가전 제품은 해체해서 재활용된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서도 쓰레기는 발생할 테니까.
최근 우리 가족은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깨달아 '소비가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불필요한 구매를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었는데, 우리의 작은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를 못 쓰는 지난 일주일간 거의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 파먹기'를 하며 지냈다. 나는 냉장고 속에 음식물을 많이 쟁여놓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잘 안 보이는 저 깊숙한 곳에 잊힌 반찬통과 냉동식품이 꽤 있었다는 걸 이번에 발견했다.
입맛에 안 맞는다고 처박아뒀던 부모님이 해주신 밑반찬,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만들어 넣어두고는 잊어버린 음식물을 쓰레기봉투에 담으며 죄책감이 들었다. 평소 냉장고 안에 음식물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것도 환경을 보호하는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 냉장고를 받은 날 저녁에 나는 가장 먼저 얼음부터 얼렸다. 냉장고가 없는 일주일간 가장 그리웠던 건 시원한 얼음물 한 잔이었다. 고작 일주일 냉장고 못 쓰는데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