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종자는 오랫동안 농민들의 손에 의해 최소 30년 이상 이 땅에 심겨진 종자를 말한다. 매년 심겨지며 조금씩 그 땅의 생태계에 맞춰서 적응해 온 토종종자는 우리 삶의 터전과 유기적으로 공명하는 존재이자 농민들이 세대를 거듭하며 만들어낸 하나의 문화유산이다. 최근 유전자변형 농수산물(GMO)과 종자주권 등의 이유로 이미 많이 주목받은 토종종자가 이상기후로 인한 기후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역 풍토에 맞는 다양성 확보를 통해 병해충 및 환경변화에서 생존율이 뛰어난 토종농작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함양군은 농업이 주요 생산기반인 지역으로 농업계획이 중요하다. 경상남도를 통해 함양군도 토종농산물 소득보전 직불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저변확대에 한계가 있다. 농업 문화유산인 토종종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토종종자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만든 토종종자 생태계를 알아보고 함양농업의 미래를 고민해본다.[기자말] |
강나루 작가의 생태예술전시 '탈립展(전)'이 제주 유인원 필드스테이션에서 8개월간의 전시를 마치고, 이달 20일부터 제주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열리는 '대지와 바람의 조각'전 참여로 이어진다.
탈립은 직역하자면 껍질에서 탈출한다는 의미로 콩 꼬투리가 벌어지며 콩이 떨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수확하지도 않았는데 콩이 익으며 떨어지는 현상은 농부에게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개량종 콩 중 대부분은 수확 편의성을 이유로 탈립하지 않는 콩이 되었다. 강나루 작가는 제주토종 잠두콩을 키우며 이 현상에 주목했다. 탈립현상을 보며 '콩이 자기 생을 스스로 이어간다'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토종콩이 떠나간 비틀어진 콩 꼬투리를 모아 엮어 작품을 만들었다.
이 전시를 준비한 강나루 작가는 스스로를 씨앗매개자라고 소개한다. 2014년부터 제주에서 텃밭농사를 이어오며 농사를 예술로 연결하고 있고 2023년부터는 씨앗바람연구소를 설립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연결을 실현하고 있다.
토종씨앗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마지막 퍼즐조각은 가치 전달이다. 토종씨앗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나루 작가는 그런 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여 성과를 내고 있다.
예술을 전공하고서 제주도까지
강나루 작가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친 후 공공미술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예술에 매진하던 시기 강나루 작가의 중심에는 생명과 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진행한 강나루 작가의 첫 개인전 주제는 '기운생동'이었다.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는 과정도 있었고 돈을 벌어가는 과정도 있었지만 공허함이 있었다. 결국 2014년 예술가로서는 완전히 경력을 마무리하고 제주도를 찾게 됐다.
예술로써 흙을 만지던 강나루 작가는 텃밭의 흙을 만지는 사람이 됐다. 예술적 활동을 멈추고 삼시세끼 요리해 먹는 감각에 집중하며 텃밭농사를 시작했다. 강나루 작가는 여성농민회 가입을 하면서 300평 이하 규모 노지농사꾼이 됐다. 농사지어도 된다는 땅이 너무나도 많았다. 귀농으로 보긴 어려웠다. 소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주대 세우는 것도 다 돈이라 대나무를 이용했다. 농기계 없이 골갱이 하나로만 농사를 지었다. 생산량을 늘리려는 목적 없이 여러 토종씨앗을 심고 수확하는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토종을 이어가는 농민으로 경험을 쌓아갔다.
강나루 작가는 여성농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전국여성농민회(아래 전여농) 제주도지회 사무장 역할을 맡았고, 제주도 토종종자 실태조사 TF팀으로 함께 제주도 전역을 돌아다니게 됐다. 강나루 작가는 토종씨앗을 삶으로 지켜온 어르신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씨앗을 수집하는 과정을 통해 씨앗의 가치를 실감했다.
"씨앗을 지켜온 어르신들에게 다시 꼭 오겠다고 하고서 시간 지난 후 다시 찾아가면 대문이 잠겨있고, 다시 뵐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어요. 이 경험을 통해 더 조바심이 났어요."
씨앗을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던 어르신들과의 물리적 단절을 경험하면서 씨앗의 단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강나루 작가. 그런 조바심은 농지에서도 반복됐다.
농사를 짓지 않는 농지를 소개받아 옮겨 다니던 5년, 땅이 좋게 만들어지면 그 위로 전원주택이 지어져서 밭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축적되는 공간이 반복적으로 없어지는 경험은 감정을 지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밭 없이 떠돌이농부로 6년 차가 되던 2019년, 예술가로 활동할 당시 강나루 작가를 기억하던 전시 기획자를 제주도에서 만나게 됐고 대화를 통해 내면의 결핍에 다시 직면했다.
"저는 제가 제주로 이주를 해서 내가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대화를 하다보니 눈물이 쏟아졌어요. 토종씨앗을 종자 먹거리와 유전 자원으로서만 말하기에 제가 느끼고 전달되지 못하는 지점에 대한 갑갑함도 있었던 거 같고요."
그 대화를 기점으로 강나루 작가는 다시 한번 예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기운, 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공공예술로 이어온 발자취는 농사를 만난 강나루 작가의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전시는 2020년 12월 진행된 강나루 작가의 네 번째 개인전 '나루: 일상의 씨앗들'이다.
"노지에서 밭농사 했던 기록을 모아서 도록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6년 텃밭 생활을 추려서 독립출판을 진행했어요."
씨앗매개 예술활동과 다양한 워크숍
작품 <만들어진 흙>은 생명순환과 생태예술로 다시 이어지는 농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농민에게는 가장 익숙한 존재인 흙을 캔버스 좌대 위 예술의 공간에 두면서 예술적 언어로 농민의 흙을 소개한다.
제주시 연동 건물 사이에서 진행된 <토종밭벼 프로젝트>는 도심 속 쓰레기 더미가 쌓일 정도로 방치된 자투리 땅에 흙을 일궈내어 토종쌀을 심고 거둔 장면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 영상으로 상영했다. 전시를 보는 관람객이 이 땅에서 난 밭벼의 볍씨차를 마시는 것으로 완성되는 프로젝트로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이 되고 그 가치가 관람객에게 전달되는 형태로 구성됐다.
2022년 씨앗바람연구소를 만들고부터는 활동이 더 다양해졌다. 특히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토종씨앗이 가지는 식재료로써의 가치를 전달하는 데 힘썼다.
'토종취향탐구 벗밭 워크숍'에서는 토종곡물로 즐기는 나만의 홈카페를 주제로 토종곡물을 다양한 음료로 가치를 전달하기도 하고, 제주시 소통협력센터에서 진행한 '토종 식재료 워크숍, 나루씨네 가정요리'에서는 토종씨앗이 식재료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요리를 통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농가밀 작업자와 제주우영 빵식탁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농촌유학프로그램으로 토종콩을 이용해 비건콩버거를 만들기도 했다.
2023년 씨앗바람연구소를 만들고부터는 활동이 더 다양해졌다. 특히 워크숍을 통해 토종씨앗이 가지는 다양한 가치를 전달하는데 힘썼다.
'토종식경험 워크숍'에서는 토종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서는 어떤 맛이 느껴지는지 비정형 맛도형을 그려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음식에서 느껴지는 미각 경험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통해 적극적인 감각으로 토종씨앗을 이해하게 된다.
그 외에도 강나루 작가는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농사와 음식, 그리고 예술이 서로 옮겨가며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이는 예술과 농사, 그리고 음식까지 모두 사랑하는 강나루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자연그대로 농민장터
청정지역 제주도의 이면에는 전국 평균보다 4배 이상 사용되는 제초제와 화학비료에 따른 제주도의 토양오염, 지하수 오염 문제가 있다.
2018년, 제주도 농어업인회관에서 생태농업을 실천하는 여성농민회 언니네 텃밭, 청정제주농업, 어설픈 농부들의 연합, 검질과 버렝이, 갸하하파머스마켓농민들 등 5개 공동체 대표가 모여 바른먹거리 직거래 장터가 만들어졌다. 현재 매주 토요일 한살림 제주담을매장 뒤편 야외에서 열리는 '자연 그대로 농민장터(아래 농민장터)'다. 농민장터는 제초제, 화학비료, 화학농약을 쓰지 않은 최소 3무재배 농산물을 출점 원칙으로 한다. 3년 전부터는 강나루 작가가 농민장터 운영위원장을 담당하고 있다.
"씨앗 받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소농이 계속해서 농사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이 시장 환경에서 사라지고 있는 토종 작물을 만나고, 어려워도 굳이 씨앗 받는 농사를 이어가려는 농부들이 더 즐겁고 행복하게 농사지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어쩌다 찾아오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처럼 매주 장을 보는 장터 현장이에요. 그런 현실은 누가 갑자기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가는 거예요."
로컬에 있는 문제를 발견한 소농들이 해결을 위해 실천한다면 장터는 지속의 과정이다. 공동체 소속 50여 팀의 100여 명의 소농들이 함께 이 농민장터를 지탱하고 있다.
농민장터는 단순히 먹거리를 돈 주고 사는 단편적인 장터 공간에서 공동체 거점의 역할을 하면서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매주 진행되고 있어 누구든 연결을 원하면 이 공간을 방문하면 된다. 농민장터는 제주 소농들의 복합문화생활거점이자 지역경제공동체로서 역할을 하는 장이다. 농민장터가 매주 열린다는 안정감은 연대를 하는 농부들에게도, 이용하는 소비자에게도 큰 위안이 된다.
올해 4월부터는 농민장터에서 연결된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데 모여 농사 지식을 나누는 '자연 그대로 텃밭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총 10명의 학생이 모여 내년 2월까지 매주 수업을 들을 예정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매대에서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것에 한계를 조금 느꼈어요. 매대에서 드러나지 않는 지점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텃밭학교를 계획했어요.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농사를 매개로 삶의 태도를 배우는 게 특징이에요."
씨앗매개자 강나루 작가. 스스로 만들어낸 '씨앗매개자'라는 직업은 어쩌면 강나루 작가가 보여준 모든 활동이 토종씨앗으로 귀결된다는 설명이다. 씨앗의 가치를 전달하는 일은 어쩌면 시급하다.
"2020년까지의 기록이던 '일상의 씨앗들'에 나오는 밭들이 지금 가면 건물이 되어 있어요. 그렇게 토양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금방 다시 올게요' 인사드렸던 어르신은 하나둘 떠나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쩌면 한정적이에요."
<연재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