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세 다카오의 <돌봄, 동기화, 자유>(2024)는 일본 후쿠오카 지역의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에서의 노인 돌봄 실천을 다룬 책이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것은 아니랍니다>(2017)의 후속편 격인 이 책은 어르신 당사자의 자유와 존엄을 해치지 않는 돌봄에 관해 깊은 영감과 성찰을 준다.
내가 일하고 있는 주간보호센터 동료들과 함께 <돌봄, 동기화, 자유>를 읽고 공부했다. 우리는 고령화, 과소화로 소멸위기에 놓인 농촌 마을에서 17년째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어르신들을 맞이했고, 또 이별했다. 긴 시간이 쌓인 만큼 돌봄의 근육도 단단해질 법 한데, 여전히 현장은 녹록지 않다. 7명의 주간보호센터 동료들은 책에 밑줄 그어가며,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읽고 토론하였다.
책 속, 시설의 문법을 뛰어넘는 '요리아이'의 돌봄 언어들은 신선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늙고 병들어 신체기능과 인지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그것은 자립생활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저자는 '노화=부자유'라고 보는 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공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기억이 모호해지며, 행동의 순서를 망각하는 노쇠한 몸. 노쇠한 몸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잘 알지 못하는 '약동'이 있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는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 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64쪽)
지금까지 '나'를 억압해왔던 사회적 통념과 구속에서 해방되고, 자유롭지 않은 몸이 자유를 가져다주는 '노쇠'의 경이로움을 예찬한다. 노쇠하여 잃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 잃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것들과 그의 소중한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다.
요리아이는 시설에 입소한 어르신이 어떤 병증을 앓고 있든, 어떤 성격이든, 어떤 행동을 하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수용하고 관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이 책을 주간보호센터 동료들과 함께 읽으니 에피소드들이 우리의 일상과 많이 비슷해서 그런지, 어쩐지 읽는 내내 저자와 '동기화' 되는 느낌이었다.
문제에서 '존재'로,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내가 변하여 새로운 나로 바뀌는 과정. <돌봄, 동기화, 자유>의 저자는, '돌봄'이라는 게 바로 그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매일 어르신들과 더불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우리의 일상은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다. 주간보호는 날마다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 감정들, 이야기들과 뒤엉켜 '삶'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만개하는 중이다.
일례를 들자면 이렇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혼자 농사지어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낸 A어르신이 갑작스럽게 치매에 걸렸고, 주간보호센터에 왔다.
짧은 시간 급속도로 악화된 치매 때문일까? 어르신은 감정 조절 기능을 상실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화를 내기 일쑤였다. 방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를 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금세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한다. 당황스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어르신의 행동 때문에 주간보호에서 함께 생활하는 다른 어르신들의 불편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르신의 행동을 병리학적 문제로 규정하면, 그 행동심리증상의 기저에 깔린 감정과 맥락을 살피기보다는 문제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두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르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매 순간 어르신과 깊이 교감하면서 어르신의 감정에 '동기화'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주간보호센터의 종사자들은 이 어르신의 정서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격앙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어르신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말로 대화를 시도한다. 어르신이 분노를 쏟아내는 한참 동안 함께 있다 보면, 전쟁과도 같은 어르신의 마음 상태가 측은하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간보호는 날마다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을 겪어내며 어르신의 일상에 동행한다.
돌봄의 세계는 논리로만 설명할 수 없고, 이성으로만 제어할 수도 없는 세계이다. 때로는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는 생각도 많이 한다. 투입 대비 산출효과를 분명하게 계산할 수 있는 '사업'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어르신의 무표정, 무감동한 반응 안에도 우리가 포착하지 못하는 감정이 있다.
욕을 하거나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려는 어르신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동도 시시비비를 따져 접근하기란 어렵다. 어르신을 '문제'에서 '존재'로 온전히 수용하는 입장과 태도에 섰을 때, 어르신과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 어르신에게 잘 접속하여 그 감정과 마음상태에 온전히 포갤 수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이 가능한가
저자는 '돌봄과 자유는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상징은 '활짝 열린 문'이라고 한다. 어르신의 '자유'와 '그 사람다운 생활'을 가장 우선시하는 '요리아이'의 철학을 상징한다는 얘기다.
돌봄과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는 선입견에 맞서는 곳인 '요리아이'의 이야기는 '증상'만을 보고 '당사자'는 보지 않는 돌봄의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심신이 취약한 당사자에게 돌봄 서비스를 제공 과정은 '안전'과 '자유'의 사이에 놓여 있다. 안전을 이유로 손쉽게 어르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장에서 인권 기반의 돌봄 실천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인 인권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요양시설의 노인 학대 문제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저자는 '돌봄'이라는 이유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너무나 간단하게 속박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돌봄 현장의 부조리한 병폐는 사회병리적 문제이다. 우리 사회가 '돌봄'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며 시설로 격리된 어르신의 자기 결정권을 박탈해도 되는 '면책권'을 부여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실패를 반복하는 듯 보여도
주간보호센터에서 일하는 우리는 '좋은 돌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고 어르신들을 만난다. 어르신과 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실패를 반복하는 듯한 나날일지라도, 그 시간의 축적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돌봄을 제공하는 우리는 '한계'를 가진 인간이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어르신의 삶에 동행하면서 새로운 '나'로 끊임없이 재탄생한다. 상호작용의 관계로 작용하는 돌봄은 절대 일방적일 수 없다.
동료들과 함께 <돌봄, 동기화, 자유>를 읽고 공부하면서 돌봄 제공자인 '내'가 회복되고 재생되는 느낌을 받았다.
돌봄 현장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을 겪으며 어떤 혼돈을 경험했는가, 어떤 고민을 하였는가에 대해 이렇게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 자체가 '좋은 돌봄'의 경지에 다가서기 위한 작은 노력일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생명은 먹히고 배설됩니다. 그 과정속에 '나'는 살아있습니다. '먹고 배설하는 것'만으로도 존재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돌봄은 그 과정을 마지막까지 돕는 일입니다.(중략)
돌봄의 심오한 부분에 가 닿을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더욱 편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