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고 해도 이럴 순 없다. 멸사봉공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유적지가 마치 흉가나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다. 대로변인데도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운전 도중 잠깐 곁눈질로 딴청을 피우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 지나칠 뻔했다. 독립운동가 이재명 의사 기념관이 그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권 피탈 불과 몇 개월 전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뒤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를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독립운동가 '기념관', 맞나
지난 3일, 십여 년 만에 전북 진안의 명산 마이산을 다시 찾았다. 진안고원의 한복판인 그곳은 더는 오지가 아니었다. 고속도로가 뚫려 교통은 사통팔달 편리해졌고,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은 여느 도시 못지않았다. 지대가 높아선지 기세등등한 폭염도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진안 읍내의 시장 골목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마이산의 북쪽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름처럼 말의 두 귀 모양으로 봉긋 솟은 두 봉우리 사이의 계단 길을 지나 암마이봉 정상까지 다녀올 요량이었다. 해발 687m 암마이봉 정상에서 건네다 본 숫마이봉의 풍광은 잊을 수 없다.
진안 읍내를 벗어나자마자 도로변에 늘어선 큼지막한 기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족히 대형 버스 대여섯 대는 수용할 만한 너른 주차장과 뜬금없는 홍살문까지 세워져 있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직감했다. 아무런 표지가 없어, 부러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내부를 살펴보았다.
주차장은 넓었지만,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오래전 사람의 발길이 끊긴 듯 시멘트 콘크리트 틈을 비집고 잡풀만 어지러이 웃자라 있었다. 홍살문의 기둥은 붉은색이 바래다 못해 만지면 바스러질 듯 삭았고, 돌계단 사이엔 칡넝쿨이 길을 가로막았다.
맨 위쪽에는 이재명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의열사가 자리하고, 양옆으로 교육 공간인 기념관과 충의당 건물이 육중하게 서 있다. 주차장 옆에는 추모사업회 간판을 내건 관리사무소가 있다. 부지만 2천 평이 넘는 규모로만 보면, 답사하는 데만 족히 한 시간은 걸릴 듯하다.
그런데,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다. 건물마다 굳게 잠겨있고, 자물쇠는 죄다 녹이 슬었다. 인적이 끊긴 건물은 얼마 못 가 허물어지기 마련이라는데, 이대로 몇 년 후면 인도와 마당을 뒤덮은 잡풀이 건물마저 집어삼킬 태세다.
한여름 땡볕에도 건물 틈마다 거미줄이 가득하고, 거뭇한 기와지붕 위에도 일부 잡풀이 자라고 있다. 문틈으로 들여다본 건물 안은 먼지 더께 수북한 창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의열사와 충의당이라는 숭고한 뜻을 담은 현판이 초라해 보여, 차라리 떼어내 다른 곳에 보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추모 시설을 만들지나 말지. 이렇게 이재명 의사를 욕보여도 되는 걸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자취는 단 세 곳뿐이다. 그가 이완용을 단도로 응징한 명동성당 입구의 의거지 표지석과 국립 서울 현충원, 그리고 이곳 진안에 조성한 기념관이 전부다.
그나마 그의 유해를 찾을 수 없어 국립 현충원엔 무후선열 제단에 위패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고, 명동성당 입구엔 의거의 위치만 특정되어 있다. 곧, 추모 시설로서 이곳 기념관의 위상과 역할은 자못 클 수밖에 없다. 불세출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는 지역민의 자긍심은 덤이다.
사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굳이 진안과의 인연을 찾는다면, 그의 본향이 진안일 따름이다. 그는 진안 이씨 가문의 22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1년 추모사업회를 꾸려 이곳에 그의 기념관을 조성한 주체도, 다름 아닌 진안 이씨 종친회였다고 한다. 가문의 사람들이 전국에 3천 명 남짓이라고 하니, 그에 대한 후손들의 존경심을 알 만하다.
설마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렇게 방치했을 리는 없다. '성역화'라는 이름으로 추모 시설을 건립할 때만 해도, 지역의 정치인들과 지자체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전북일보>의 보도('순국선열의 날' 매국노 이완용 단죄한 이재명 의사기념관, 외면 속 관리 부실, 2023년 11월 16일)에 따르면, "당시 성역화사업에는 진안군도 참여했고 군비를 포함해 총사업비 34억 원이 투입, 2009년까지 의사의 본관인 진안 이씨 재실 앞 부지에 5채의 건물로 이뤄진 기념관 조성이 완료"됐다고 한다.
그런데, '성역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던 걸까. 번듯하게 시설은 갖췄으되, 정작 운영에 대한 인식은 태부족이었던 듯하다.
앞선 보도에서 <전북일보>는 이미 "당초 취지와는 달리 조성된 기념관은 지자체 차원에서의 마땅한 홍보가 없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등 보훈 기관에서는 관리를 민간 단체인 종친회에게 무작정 떠넘기고 있어 기념관은 점차 폐허로 전락하다 현재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실정"이라는 것.
매체는 이어 "실제 몇 년 전부터 기념관의 체계적인 관리 및 수리를 요청하는 군민들의 민원이 몇 건 접수됐지만 진안군은 관리 주체가 종친회라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해당 보도에서 진안군 관계자는 "기념관 조성을 추진했던 진안 이씨 종친회장 등 관계자가 대부분 세상을 떠나 마땅한 관리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토지보상금과 관련된 예산 문제도 상존해 있어 군 차원에서 인력을 배치하고 관리에 나서기도 모호한 상황"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서로 책임을 미루며 하릴없이 세월이 흘러가고, 기념관은 나날이 흉물스럽게 퇴락해 갔다. 일부에선 또다시 세금을 들여 보수를 하느니 차라리 철거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듯하다. 서글프게도, 입구의 바리케이드와 건물의 녹슨 자물쇠가 열릴 날이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이곳을 내로라하는 추모 시설로 되살릴 유일한 해법은 이재명 의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친회와 정부 기관, 지자체를 탓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성찰해 보자는 거다. 당장 이재명 의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오류투성이다.
그의 출생 연도가 사료와 유적지마다 다르다.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1887년에 태어났다고 적시되어 있지만, 명동성당 입구 의거지 표지석에는 1890년생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진안 이씨 종중의 영모재 앞에 세워진 동상에는 1888년에 태어났다고 새겨져 있다.
태어난 곳도 다르다.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평양에서 태어났다고 했지만, 다른 사료에는 평안도 선천 출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출생지가 불분명해서인지, 그냥 평안도 출신이라고만 적은 사료도 여럿이다. 20년 남짓의 짧은 생애 탓인지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무척 소략하고 엉성하다.
주위엔 이재명 의사를 생소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의사라는 수식어를 빼고 말하면, 십중팔구 야당 정치인 이재명을 먼저 떠올린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해도 한참을 스크롤해야 만날 수 있는 처지다. 이재명이 엄혹했던 시기 갓 스물을 넘긴 조선 청년의 기백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기억될 때라야 비로소 이곳의 '성역화'가 완성될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모르는 현실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체포되어 순국한 이재명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
을씨년스러운 기념관을 나오면서, 대로변에 이렇게 적은 표지판을 세워두고 싶었다. 이재명 의사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온 국민이 다 아는 이완용을 앞에 내세우는 게 더없이 효과적일 성싶었다. 그러자면, 이곳에 들른 이들이 매국노 이완용은 알아도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잘 모르는 부박한 현실을 새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퇴락한 이재명 의사 기념관의 몰골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대한 우리 국민의 무관심을 방증한다고 하면 억측일까. 최근 강제 동원 표현을 삭제한 채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등재에 찬성한 우리 정부의 굴욕적인 결정 또한 '믿는 구석'이 있어서 벌인 작태 아닐까. 하긴 대통령이 나서서 "100년 전 일로 일본에 무릎 꿇으라고 할 수 없다"며 일본을 두둔하는 마당에 애꿎은 국민의 무관심을 탓하려니 뒤통수가 따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