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각에서 정부의 조세재정정책의 이면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세금과 예산은 민주정치의 전제이자 결론이며,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기자말] |
지난 1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낸 <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라는 보고서가 화제를 모았다. 이 보고서가 이목을 끈 것은 실상 중산층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자산을 소유한 이들의 상당수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체계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 소득 상위 20% 집단 중 84%는 자신을 중층이라고 봤고, 10%는 심지어 하층이라고 봤다. 본인이 상층이라고 여기는 이는 6%에 지나지 않았다. 보고서는 이러한 불일치가 정책 여론 형성에 왜곡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실제로는 상층이면서 중산층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이러한 '가짜 중산층'은 상류층에 대해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을 '중산층 정책'이라는 여론을 만들어 관철시킬 동기를 가질 수 있다. 높은 소득·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로 여론형성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유력정당들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과잉대표될 수 있다. 그들이 '중산층'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정당에게도 상류층을 위한 정책에 찬동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최근 발표된 상속세 개정안은 이런 현상의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만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0일 국무회의에서 이번 상속세 개정을 두고 "중산층 가정의 부담을 덜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주요 정치인들 역시 정부의 상속세 개정안을 반대하면서도 중산층의 부담을 줄이는 개정 방향성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상속세 개편의 두 가지 방향성
이번 상속세 개정안은 두 방향성이 있다. 하나는 기업상속과 초고소득층에 대한 대폭의 세금 감면이다. 대략 연간 1000명 정도인, 상속세 최고세율 50% 적용되는 상속인들은 기본적으로 10%p의 세율인하 혜택을 받고, 최대주주라면 10%p의 할증 폐지 혜택까지 받게 됐다.
즉 총세액의 20~30%를 줄일 수 있게 됐다. 100억 원 낼 세금이 대략 70~80억 원으로 줄어든다는 이야기다. 역대급 세수결손과 재정적자가 이어지고 있는 재정 여건에서 해당 조치가 야기하는 감세폭이 현실적으로 매우 크고, 본질적으로는 기업지배구조 및 기업소유의 철학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만큼 이 세율 조정의 의미는 작다고 할 수 없다.
또 하나의 방향성은 공제규모의 대폭 확대와 과표 조정이다. 지금까지의 상속세는 5억 원의 일괄공제와 자녀 1인당 5천만 원의 공제 중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체로는 5억 원의 일괄공제를 받는 것이 유리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자녀 공제를 1인당 5억 원으로 확대한다. 자녀가 둘이라면 공제액은 10억 원이 되고, 배우자가 있다면 공제 금액은 최소 15억 원으로 대폭 확대된다. 여기에 원래 자녀공제 옵션에 들어 있는(일괄공제 5억 원을 선택하면 받을 수 없었던) 기초공제 2억 원이 추가되어 공제액은 17억 원까지 늘어난다. 즉 상속재산 17억 원까지는 상속세가 0원이 된다. 혜택 규모는 자녀 수에 따라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는 공제액이 크게 늘어 상속세 면제가 대폭 증가하는 개정인 것이다.
피상속인 수 관련 자료를 국세청이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법 개정으로 발생하는 상속세 면제 숫자를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간접적으로 어림해 볼 수는 있다. 지난해 기준 총상속재산 10억 원 이하는 5661명으로 전체 상속인의 28.4% , 20억 원 이하는 1만 3966명으로 전체의 70.0%에 이른다. 대체로 상속인들이 2명 안팎의 피상속 자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체 상속인의 절반 가량이 이번 개정안으로 상속세 대상에서 면제될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를 내더라도 공제 확대로 세액은 대폭 줄어들어 고액 상속세를 부담해야 하는 이들일수록 혜택 금액은 대폭 늘어난다.
최고세율을 조정하는 첫 번째 방향성은 누구도 중산층과 관련된 문제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상속세 최고세율에 도달하려면 온갖 공제를 다 빼더라도 최소 30억 원을 물려줄 수 있는 상속인 상위 0.3%는 되어야 한다. 어떤 기준으로도 이들을 중산층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즉 윤석열 대통령이나 민주당이 '중산층 정책'으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부분은 공제액을 대폭 확대하는 두 번째 방향성에 대한 것이다.
상속세가 중산층 세금이 되었다는 거짓말
그러나 상속공제 확대 역시 중산층 정책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 상속세 대상자가 중산층일 수 없기 때문이다. 2022년 상속세를 1원이라도 납부한 이는 전체 상속인의 상위 4.5%다. 2023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기준(2022년 대상) 순자산 상위 5%안에 들려면 넉넉잡아 15억 원은 있어야 한다. 이들을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시 강조하건대,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 기준이다.
국제적으로 명확하게 합의된 중산층 기준은 없지만, 대한민국 통계청이 주로 활용하고 있는 OECD의 중산층 기준은 중위소득 50~150%를 일컫는다. 가계금융복지조사 기준 2022년 중위소득(균등화처분가능소득 기준)은 연 3454만 원이고, 150%면 연 5181만 원인데 소득 상위 20%의 경계선이 연 5397만 원이다. 즉 중산층의 위쪽 경계는 소득 상위 2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소득 상위 대략 20% 아래, 즉 연소득 5181만 원 이하인 이들 중 순자산이 15억 원 이상인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자료에서 소득 4분위(상위20~40%)의 순자산 평균이 6억 1553만 원에 그쳐 15억 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한 이들 중에도 단 22%만 순자산 상위 20%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상위 5%인 15억 원 이상의 순자산 보유자는 대단히 적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애초 순자산 상위 20% 경계선만 하더라도 7억 950만 원이다. 15억 원의 절반 수준에 그치는 것이다.
이처럼 상속세는 중산층이 경험하기가 매우 어려운 세금이다. 따라서 이번 상속세 개정은 원천적으로 중산층 정책일 수가 없다.
중산층 사다리 걷어차기?
자산 상위 5%를 중산층이라고 주장할 자신이 없으니 '중산층 사다리 걷어차기'로 비틀어 정당화를 시도하는 이들도 있다. 중산층 자식이 부모 재산 물려받아 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상속세가 방해하니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논리다. 현재의 상속세율은 사다리를 걷어차기는커녕 사다리를 '어루만지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역시 어불성설이다.
2022년 국세통계연보 기준 신고상속재산은 26조 6000억 원, 결정세액은 4조 9000억 원으로 상속세 실효세율은 19%에 그쳤다. 평균적으로 상속 건당 4억 원을 세금으로 내고 16억 원을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최고세율 적용이 대거 포함된 평균이 이 정도인데, 세율 하단 구간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평균 7억 원을 물려준 상속인 하위 50%의 경우 평균 상속세액은 4000만 원도 되지 않았다.
앞서 밝혔듯이 순자산 7억 원만 넘어가도 대한민국 상위 20%다. 물려받을 재산이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뿐, 상속세 때문에 마땅히 되어야 했을 상류층이 못 된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씁쓸한 것은 상속으로 자식을 중산층에서 탈출시키려는 욕구를 장삼이사의 욕망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자연법적 권리인 양 포장해 언론과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수없이 반복한다는 것이다. 애초 상속세가 계층 상승을 '방해'하지도 못하고 있지만, 상속으로 상류층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장려하는 사회에 도대체 어떤 희망이 있단 말인가?
상속세, 미래에는 중산층 세금이 될 것인가?
시간이 흘러도 세금의 과표가 그대로면 인플레이션과 소득·자산증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과세대상과 세액은 늘어난다. 이른바 브래킷 클립(bracket creep)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과표 조정이 없다면 과세대상자는 차츰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상위 4.5%가 과세대상인 상속세는 언제쯤 중산층의 끄트머리에 닿을 것인가? 단순하게 현재의 소득기준을 원용해 자산 상위 20%, 2022년 기준 대략 7억 원 이상의 순자산을 중산층 과세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여기까지 과세되는데 장구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국세통계연보 기준 상속세 과세자 비율이 0.7%에서 4.5%까지 오르는 데 22년이 걸렸다. 2020~22년의 평균상승률인 연간 0.8%p를 적용해 본다면 과세자 비율이 20%를 넘기는 시점은 2042년이다. 10년에 2배씩 오르는 속도를 적용해도 비슷한 시기로 도출된다. 중산층 걱정은 20년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브래킷 클립'을 이용한 암묵적 증세를 하면서 정부가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일을 생략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본다. 마땅히 매년 '브래킷 클립'의 적용 이유와 예상 세수효과를 국민들에게 공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동시에 '브래킷 클립'을 활용한 상속세 증세를 멈춰야 한다는 시각에도 공감하지 않는다. '브래킷 클립'은 과세범위가 지나치게 좁은 세금이 일정 규모의 과세가 가능하게끔 조세저항의 수위를 조절해 안착할 수 있게 한다. 최소한 상속세가 '상류층에 대한 과세'라는 전제라도 국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자산 상위 10~20%까지 과세될 수 있도록 과표구간을 정태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합리적인 과세 방침이다.
상속세가 '중산층 세금'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데 한편으로는 상속세가 중산층 세금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현행법상 5억 원 복권에 당첨된 광수는 1억 3200만 원의 세금을 낸다. 5억 원의 종합소득을 올린 영숙은 1억 9100만 원의 세금을 낸다(편의상 각종 공제는 생략했다). 그런데 5억 원을 상속받는 옥순은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는다. 근로나 사업소득, 심지어 복권 당첨 소득보다도, 자산이 많은 부모를 둔 덕에 얻게 되는 소득을 더 우대한다. 비생산적인 경제행위일수록 더 큰 혜택을 준다.
대한민국 구성원 모두가 비슷한 자산을 물려받는다고 하면 이런 조세형평 부재는 사회적 약속의 형태로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언젠가 한 번은 5억 원을 상속할 기회가 있을 때 유산에 비과세를 하자는 건 전 국민에게 최소 자산을 형성할 기회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용납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국세통계연보상 국민 다수는 한푼의 상속자산도 받지 못한다. (상속세 개정안에 따라 혜택을 받는) 상속자산을 5~10억 원을 물려주는 상속인은 연평균 4000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들이 같은 소득에 대한 소득세 세율보다 지극히 낮은 세금만 부담할 정당한 사회적 이유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국가재정의 확보와 불평등의 해소를 위해 정부는 여러 방식의 과세조합을 선택할 수 있다. 소득세나 보유세를 중심에 둘 수도 있고, 상속증여세에 무게를 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이 모두를 조합한 조세정책의 결과가 특별히 중산층만 그 범위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국세통계연보상 2022년 기준 근로소득 상위 8~15%인 6000~8000만 원 구간의 실효세율은 5.5%에 그친다. 자산 상위 10%인 순자산 10억 8000만 원에 준하는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다면 종부세도 내지 않는다. 주식투자자 소득 상위 1%에게만 과세될 것으로 예상되는 금투세에서는 대부분 제외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챙겨줘야 할 이유가 있는가?
'가짜 중산층'에 아첨하는 이유는
다수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이번 상속세 개정안은 못 받는다고 말한다. 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재작년 5년간 74조 원에 달하는 윤석열 정부의 감세안을 부자감세라고 비난했지만 결국 대부분 합의해 줬다. 당대표 연임이 유력한 이재명 전 대표는 금융투자소득세도 유예하자고 하고, 종부세도 특별한 대안 제시 없이 완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상속세의 유산취득세 개편 시도에 대해서도 민주당 일각에서는 찬성 입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소득세 과표도 물가와 연동시켜 고소득층 소득세를 대폭 깎아주는 안들을 대거 발의해 온 역사가 있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상속공제 확대도 못해 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예언한다. 상속세 최고세율은 45% 수준에서 타협을 보고, 최대주주 할증과세 폐지는 받아주지 않는 선에서 민주당은 '초부자감세 반대'의 명분을 세울 것이다. 과표 조정과 자녀 1인당 5억 원 상속공제는 정부안으로 합의하면서 양당 모두가 '가짜 중산층'의 이해를 수호했다는 정치적 득점을 챙긴다. 이 정도가 타협점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이해관계자들이다. 지난 5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2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재산 평균은 19억 원이다. 물론 순자산이다. 평균적인 민주당 국회의원은 이번 상속세 개편으로 상속세를 내지 않게 되거나 크게 줄일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평균 46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대부분의 국민의힘 의원들(안철수 의원 제외)이나, 올해 43억 원의 재산을 신고한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상속세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자산 상위 5%에 들어가는 이들이다.
민주당 국회의원 평균에 가까운 20억 원 상속재산에 자식이 둘이라면 이번 세법개정으로 줄잡아 상속세 2억 원은 아낄 수 있다. 이 2억 원은, 대한민국 가구의 중위자산(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기준 2억 4000만 원)과 엇비슷한 돈이고 서울 외곽 투룸 매입임대주택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이러한 그들의 속사정은 동류의 지역구 여론을 과대대표할 것이며, 그들이 지역의 '서민'을 대표한다고 믿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을 다시 특권층으로 끌어올릴 확률을 상승시키고, 또 그들의 성을 공고하게 만드는 세제와 정책들을 '중산층'의 탈을 쓰고 대를 물려가며 관철시킬 것이다. 대한민국 양당체제의 진정한 문제점은, 그들의 차이에 있다기보다는 앞다투어 '가짜 중산층'에 아첨하는 그들의 유사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