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인 금산군수가 최근 민간단체에서 주관한 인삼 종주지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사실이 회자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금산군은 그동안 인삼의 종주지(인삼의중심 생산지)로 개삼터(금산 남이면)를 꼽아 왔는데 민간단체가 내세우는 곳은 월명동(금산 진산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삼종주지 기념비를 세운 월명동은 기독교복음선교회(JMS, 총재 정명석)가 성지로 꼽고 있는 곳이라 논란을 키우고 있다.
백제금산인삼발원종주지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 7월 20일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제인삼 종주지 기념비 준공식' 행사를 열었다. 준공식이 열린 곳은 진산초등학교 체육관이지만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월명동이다. 금산 인삼의 주요 산지이자 종주지가 월명동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준공식에는 박범인 군수도 참여했다. 박 군수는 축사에서 "세계적 명물 금산 인삼이 더 넓은 계층에게 각광받는 식품이 될 수 있도록 제품 기획에서 마케팅 등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소식이 뒤늦게 금산군민에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①] 금산군은 '개삼터 종주지'라면서 군수는 '월명동 종주지' 행사에?
핵심 논란은 오랫동안 금산군이 금산 인삼의 종주지로 '개삼터'를 내세우고 있는 터에 박 군수가 '월명동 종주지 기념비 준공식'에 참석해 축사하는 게 타당하냐는 지적이다.
금산은 오랜 역사를 가진 인삼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금산군이 오랫동안 일관되게 밝혀온 인삼의 최초 재배지이자 종주지는 '개삼터'다. 금산군 누리집에도 관련 설명이 상세히 나와 있다.
금산군은 '개삼터'에 대해 '금산인삼이 오늘이 있기까지는 먼 옛날 한 효자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면서 1500년 전 개삼터에 얽힌 얘기를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00년 전 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부친을 여의고 모친마저 병들어 자리에 누웠는데 꿈속에서 산신령의 계시로 관음봉 암벽에서 풀뿌리를 찾아 달여 드린 뒤 병환이 나았다. 강 처사는 그 씨앗을 지금의 남이면 성곡리 개안 마을에 심어 재배에 성공하는데 뿌리의 모습이 사람의 형태와 비슷하다 해 '인삼'이라고 이름 붙었다. 개안마을에는 인삼을 사람 손으로 처음 재배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금산군은 강 처사가 처음으로 인삼씨를 뿌렸고 재배에 성공한 기념비적인 땅의 이름을 '개삼터'로 정하고 이곳에 개삼각을 지었다(1987년 7월). 또 매년 금산인삼축제 첫날엔 개삼각에서 한해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인삼 최초 재배지는 금산 기원설, 화순군의 동복 기원설, 풍기 기원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7월 20일 기념비 제막식에서 전연석 백제금산인삼발원종주지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 총괄추진위원장(전 금산군 의원)은
CMB대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개삼터보다 더 진산면 읍내리를 통해 성역화를 준비하고 있다"며 "금산군이 개최하는 금산인삼제 때 첫 번째 코스가 이곳이 된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박 군수가 민간단체에서 주도한 또 다른 금산 인삼 종주지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것은 종주지 논란을 키우는 경솔한 행보라는 비판이 나온다.
[논란②] 민간단체가 인삼 종주지 기념비 세운 땅은 'JMS 소유'
또 다른 논란은 민간단체(추진위원회)가 종주지 기념비를 세운 월명동이 기독교복음선교회(JMS)가 성지로 꼽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추진위원회가 월명동을 종주지로 꼽은 이유는 중부대 한국어학과 최태호 교수의 주장을 근거로 삼고 있다. 최 교수는 <삼국사기>에서 '백제 무령왕 12년(서기 512년) 4월에 중국 양나라에 인삼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진산군 월외리(月外里)에서 인삼이 나왔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33권 진산군(珍山郡) 편을 보면 '인삼·철 : 진산군의 서쪽 월외리(月外里)에서 난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진산면에는 '월외리'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없다. 최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지금의 월명동(月明洞)이 예전 달(月) + 밝(밖, 外) + 골(里)로 불렸다'며 '조선시대 당시 달밖골을 한자로 차자해 월외리로 썼고, 이것을 다시 현대식으로 표기하면서 월명동이 된 것'으로 봤다.
그런데 예전 달밖골로 불리던 곳의 법정명은 진산면 석막리다. 정부가 1950년대 말 제작한 행정지도에도 '석막리(달박곡)'로 기재돼 있다. 석막리는 정명석 기독교복음선교회 총재의 출생지이자 고향이다. 월명동이란 이름은 기독교복음선교회가 석막리 내에 교회와 연수원을 지으면서 붙인 이름으로 월명동=기독교복음선교회 성지를 의미한다.
추진위원회가 종주지 기념비를 세운 곳은 월명동 성지 바로 위 산등성이다.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기념비가 들어선 땅의 소유주는 현재 기독교복음선교회로 돼 있다. <브레이크뉴스>는 전연석 총괄추진위원장의 전언으로 "기념비는 진산면 주민들이 정명석 목사와 의논해 진산면 월외리 달박골 앞섶골에 세웠다"고 보도했다(7월 20일).
이 때문에 민간단체인 추진위원회가 굳이 기독교복음선교회 소유인 월명동 수련원 부지에 기념비를 세운 데 대한 뒷말이 일고 있다. 이와 함께 월명동의 의미를 잘 아는 박 군수가 이날 행사에 참석해 축사한 데 대해서도 비판이 커지고 있다.
[논란③] 그래서 '월명동'을 인삼 종주지로 볼 수 있는가
석막리(월명동)가 '백제금산인삼의 종주지'로 불릴만 한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월명동 종주지 설'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최태호 교수는 <삼국사기>에 '백제 무령왕때 중국 양나라에 인삼을 예물로 보냈다'는 기록과 당시 백제의 수도가 부여(무령왕 당시 백제의 수도는 부여가 아닌 공주였다)에서 50km 정도에 위치해 거리가 가까운 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른 백제 지역에서 인삼이 났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양나라에 선물로 보낸 것이 진산에서 난 인삼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의 주장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인삼 산지 '월외리'가 지금의 석막리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삼국사기> 무령왕을 엮어 '월명동이 종주지'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6년(1530)에 간행한 것으로 조선 성종 때 발간한 <동국여지승람>의 증보판이다. 최 교수는 1530년 기록을 근거로 당시로부터 1000년 이상을 뛰어넘은 백제 무령왕 때 인삼 생산지를 지금의 석막리(월명동)로 본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의 충북 증평군 등도 인삼이 나오는 곳으로 기재돼 있다). 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당시 전국 모든 지역을 망라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보다 76년 앞선 <세종실록>(1454년 편찬)에 수록된 고려인삼 자생지는 전국 113개 지역으로 도서지방을 제외한 조선 8도 전역에 걸쳐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재위 기간(1418~1450) 동안 인삼을 중국에 진헌품으로 보낸 횟수만 101회, 규모는 1만1000근(7060kg)에 이른다(2021년 세종실록을 통해 본 고려인삼, 주승재 서울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참조).
<세종실록>을 보면 백제 무령왕 당시 백제에 속했던 지역 중 당시 백제 수도와 인접한 충남 세종 지역만을 놓고 봐도 인삼 자생지는 지금의 논산시 은진면과 연산면, 계룡시, 예산군, 보령시, 예산군 대흥면, 아산시, 세종시 전의면, 세종시 전동면, 천안시, 공주시 등 충남 지역 대부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만을 근거로 월명동을 '고려금산인삼 종주지'로 특정한 근거가 부족해 보이는 이유다.
이같은 논란에 대해 금산군 관계자는 "군수께서 월명동이 인삼 종주지라는 주장에 동조해서가 아닌, 인삼의 효능에 대한 홍보와 금산인삼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제막식에) 참석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금산군은 개삼터를 종주지로 보고 있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