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고주리 순국선열 6위가 경기도 화성에서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묘역 옆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6위가 모셔져 있는 묘는 6기가 아니라 3기뿐이었습니다. 3기 모두 묘비에는 '고주리 순국선열의 묘'라고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고주리 순국선열의 묘'에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자 일본 군경은 시위에 나선 군중을 향해 발포를 하는 등 무력 탄압에 나섰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3·1운동에 대한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속여 학살한 사건도 있었으니 바로 제암리 사건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 보병 중위 아리다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일본군 20여 명이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 도착해 마을사람에게 알릴 것이 있다고 속여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20여 명을 교회에 모이게 하고는 사격을 가한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때 교회당 안에서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암리 교회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과 위생학 교수로 있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제암리 사건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사진에 담아 세상에 알렸습니다. 스코필드는 사건 발발 이틀 후인 4월 17일에 제암리 사건 소식을 듣고는 다음 날인 18일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고 기차를 타고 수원역까지 갔습니다. 다시 자전거로 사건 현장에 도착해 사건 현장을 사진으로 담았고,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수원 지역 3.1운동은 기독교와 천주교가 주축이 되어 일어났고, 종교인뿐아니라 학생, 상인, 기생 등 다양한 계층이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관공서를 파괴하는 등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저항도 강하게 표출되었습니다. 특히 일제가 제암리 사건의 빌미로 삼았던 발안장(향남면 발안리) 만세운동은 일본의 만행에 분개해 방화를 포함해 격렬하게 전개된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결혼식날 일가족 학살... 시체 수습도 막아
일본군은 제암리에서 위와 같은 방화, 학살을 저지른 것에 그치지 않고, 바로 옆 마을 고주리로 이동해 김주업의 결혼식을 위해 모였던 김흥열(김흥렬)의 일가족 6명을 칼로 죽이고 시체를 불태우는 만행을 이어갔습니다. 잔혹하게 학살 당한 6명의 시신 상태는 너무도 처참해서 누구의 유해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학살 사건 이후에도 일본군은 매일 고주리에 들러 시체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3일 후에서야 시체를 묻으라고 해, 마을 사람들이 시체를 수습해 분묘를 만들었는데 3기 밖에 조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희생된 이는 김흥열을 비롯해 동생 김성열, 김세열, 그리고 조카 김흥복(김성열의 아들), 김주남(김세열의 아들), 김주업(김세열의 아들)이었고, 모두 천도교인이었습니다. 이중 김흥열과 김성열 형제는 수원 발안장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었습니다. 정부는 순국한 김씨 일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이들을 모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고, 유족과 천도교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4월 15일에 추모제를 거행해 왔습니다.
이들의 묘는 그동안 화성시 팔탄면 덕우리 공설묘지에 있었습니다. 유족들은 고주리 일대를 유적지로 지정하고 사건 현장(고주리 240)에 추모비를 세우려고 시도했지만, 재산권 침해를 우려하는 마을 주민들의 잇따른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묘를 관리해온 유족도 고령으로 인해 관리에 어려움을 겪자 유족들은 국가관리묘역 지정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결국 대전현충원으로 이장을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국가보훈부는 2024년 6월 7일, 팔탄면 덕우리 공설묘지에 안장된 고주리 순국선열 합동묘역을 개장했고, 유해를 화장한 후 화성 독립운동기념관에 잠시 모셔두고 8일과 9일 이틀간 추모 기간으로 삼았습니다. 국립묘지 밖에 있던 유해를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다보니 각 분묘로 구분된 상태를 유지한 채 모셔와야만 했습니다.
이 때문에 덕우리 공설묘지에 3기의 분묘로 구분되어 있던 것처럼,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에도 고주리 순국선열 6위의 묘는 3기가 조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고주리 순국선열 6위의 묘도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 묘역처럼 누구의 유해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묘비에 이름을 새기지 못하고 '고주리 순국선열의 묘'라고만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향후 수유리 한국광복군 합동 묘역처럼 별도의 안내 상석을 설치해 고주리 학살 사건과 그때 순국한 선열들의 뜻을 알릴 예정입니다. 이름도 없는 고주리 순국선열 6위의 묘가 수유리 한국광복군 17위의 묘 바로 옆에 자리한 이유입니다.
고주리 학살사건은 제암리 학살사건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주리 학살 사건에 앞서 벌어진 제암리 사건과 관련된 유적지는 3.1운동 순국기념탑,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 23인순국묘지 등 다양하게 조성된 반면, 고주리 사건 관련 유적지는 제대로 조성되지 못한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제강점기 화성 지역 사람들의 독립운동과 그 정신을 기리고 위해 기존의 '제암리3.1운동 순국 기념관'을 확장 이전해 2024년 4월 15일에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을 개관했다는 것입니다.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에는 제암리 사건뿐 아니라, 고주리 사건을 비롯해 화성지역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이지영, '제암리 학살사건의 전개와 성격', 충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논밭 팔아 독립운동 헌신… 돌아온 건 '주민 이기주의'," <기호일보>, 2024.06.17.
국가보훈부 보도자료 '고주리 순국선열 6위 합동 봉송식 10일 화성에서 거행'(2024.06.10.).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https://hs815.hscit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