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 사내 대장부라 할 수없다."
不到長城非好汉
중국의 초대 주석,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한 말이다. 사람이 큰 뜻을 품고 또 펼치려거든 만리장성에 올라보는 것이 좋다는 취지다. 동서양의 남녀노소 모두가 일생에 한 번쯤 꼭 가보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으리라.
중국 하면 가고 싶은 곳 내지 떠오르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아마 십중팔구 만리장성을 언급하지 않을까 싶다. 깊은 역사와 더불어 넓은 지역에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중국을 대표하는 제일의 관광지라고 할 수 있으테니 말이다. 중국 비자를 발급 받으면 만리장성이 배경으로 삽입되어 있다. 중국인들도 그렇게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교과서에서 처음 알게 된 이래, 언젠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코로나19의 유행과 개인적인 사정 등이 겹쳐 뜻을 이루지 못하던 중, 중국 장가계 여행을 다녀온 것을 시작으로 모험심이 충만해졌다. 그래서 지난 7월 하순 베이징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베이징은 항공기로 불과 2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짧은 거리인 만큼 항공료도 저렴한 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고, 눈 깜짝할 새 도착했다. 공항철도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난 뒤, 버스를 타고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만리장성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다. 어디가 되었든 베이징 시내에서는 두 시간 이상 소요되는 외곽 지역이라, 관광객들이 주로 많이 찾고 있는 팔달령(八達嶺) 지역이 아닌 한산한 모전욕(慕田剝) 지역으로 정했다.
버스에는 서양인 관광객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의 행색과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영어를 들어보니 만리장성 성곽을 모두 걸어서 완주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편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경관을 보려고 했는데, 그 넓은 구간을 걸어서 완주하려는 그들의 도전정신 앞에 잠시 부끄러워졌다.
이윽고 모전욕 만리장성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여권을 제시하고 케이블카에 탑승해 산을 한참 올라 드디어 만리장성에 발을 디뎠다. 어떤 중국인 할아버지가 라디오로 전통 음악을 틀어 놓고 앉아서 쉬고 계셨다. 흘러나오는 음악과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궁합이 잘 맞아 여러가지 생각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전율이 흘렀다. 그렇게 눈 앞에서 한바탕 생생한 전투가 몇 분 동안 펼쳐진다.
산세가 험준한데 성까지 쌓아 놓았으니, 제작 당시로서는 외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전투 중 안전하게 활을 쏠 수 있도록 중간중간 여백을 둔 점과 성벽을 여러겹으로 두텁게 쌓아 내구성에 신경을 쓴 부분도 인상 깊었다. 화살만 충분하다면 수 십만 대군도 너끈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날은 서태후가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하여 유명한 이화원을 방문했다. 서태후는 중국 역사의 마지막 황제인 청 황제 푸이(溥儀)의 친할머니로, 섭정을 통해 오랜기간 권력을 독점했던 야심가다.
이곳 이화원은 명과 청 시대의 황제들이 별장으로 사용하며 주로 뱃놀이를 통해 여름을 보냈던 곳이다. 그래서 영문 명칭은 '섬머 팰리스 Summer Palace(여름궁전)'이기도 하다. 마음 편히 세월을 보낼 수 있도록 곳곳에 휴식처가 설치되어 있고, 그늘이 되어 줄 나무도 빽빽하다. 그래서 햇빛이 부족해 사진을 예쁘게 찍을 곳이 마땅하지 않은 편이다.
호수의 넓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석촌호수의 면적을 10번 합쳐도 견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배가 많이 떠 있지만, 많아 보이지 않는다. 복잡한 정사를 다루느라 고되었을 황제의 심신을 달래주려 웅장한 규모로 설계된 것 같다. 다만 공사를 위해 투입되었을 백성들의 노고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래서 즐겁지만은 않다.
마지막 일정으로는 명과 청시대에 연이어 황제가 기거했던 자금성을 찾았다. 우리나라 궁전의 지붕이 통상적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다면, 이곳은 황제의 색상인 황금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궁궐 주위를 해자(垓子)가 둘러싸고 있어 방어에 용이하고, 중국의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각각의 건축물이 크고 화려하다. 자금성의 면적 자체는 사실 경복궁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백의 미가 있는 우리 경복궁과 달리 큰 건축물들이 비교적 밀집되어 있어, 심리적으로 웅장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기에 이보다 좋은 궁전을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나라도 연이어 자금성을 황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6살의 나이에 쫓겨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일생이 영화화 되며 '정원사가 된 비운의 황제'라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장엄한 이곳을 둘러보면 그가 느꼈을 상실감을 같이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푸이를 비롯한 청의 황제들이 정사를 살피던 집무실과 의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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