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대만의 타이베이에 있는 228국가기념관을 방문했다. 228국가기념관은 일본의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건물이다. 당시에는 교육회관으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홍보되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228국가기념관은 228사건의 진실을 알리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는 장소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228사건은 대만 현대사의 본질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이 물러난 이후, 대만에는 장제스가 지도하는 국민당 정부가 들어왔다. 당시 대만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온 이들을 외성인으로, 본래 대만에 있던 사람들은 본성인이라고 불렀다. 대만이 해방된 초창기에는 본성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온 국민당 정부 인사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외성인들이 대만의 고위직 행정부 인사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특히 이들은 술과 담배를 독점적으로 통제했다. 또한 당시 대만에서는 부정과 비리가 만연했으면, 물가 상승과 실업자 증가로 사회가 불안해졌다. 결국 대만인들에게는 해방의 기대감이 암흑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대만에서 1947년 2월 28일에는 228사건이 발생했다. 처음 사건의 시작은 담배판매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한 시민의 죽음이 발단이었다. 대만 군중들은 이에 항의하여, 다음 날 대만의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장관의 집무공관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위병들이 기관총으로 시위 군중에게 발사하였다.
결국 이날을 시작으로 반정부 시위가 대만의 곳곳에서 열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1947년 3월 8일 국민당 정부 군대가 대만에 상륙한 이후, 대륙에서 온 군인들이 시민들을 진압을 하는 것을 넘어서 대만 시민들을 학살했다.
설상가상 1949년에는 국민당 정권이 중국 대륙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 정권에 패배하여 대만으로 이주했다. 이로써 오랜 세월 동안 대만에서는 228사건의 진실이 묻혀 있었다.
하지만 지난 1987년 2월 4일에는 시민 사회를 중심으로 <228평화일촉진회>가 결성되었다. 대만의 시민 세력들은 정부에 228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희쟁자의 명예를 회복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특히 이들은 2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결국 1995년 2월 28에는 대만의 최고 지도자인 리덩후이 총통이 228사건 희생들과 유족 그리고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곧이어 228사건과 관련된 특별법이 제정되며, 법률에 근거한 228사건기념재단이 설립되었다. 또한 지난 2011년에는 지금의 228국가기념관이 정식으로 개관했다.
한때의 역사는 암흑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두려움은 더욱 켜켜이 쌓여만 같다.
다만 민주주의로부터 빛이 밝아지며
그 빛은 먼지로 묻힌 사실을 비추었다.
결국 진상은 밝혀지고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 228국가기념관의 입구의 알림글
228국가기념관은 3층의 건물에 10개 정도의 장소로 구성되었다. 우선 228사건의의 배경과 사건이 발발하는 과정, 시위 군중이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과정과 군인들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공간이 있다.
다음으로는 228사건 당시 시민측 지도부 인사들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228사건으로 고통을 받은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228국가기념관은 타이베이 식물원 근처에 있다. 228국가기념관은 오전 10시에 개관하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또한 228사건을 설명하는 한글 책자가 제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