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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을 만나면 '퇴임하니 어떻냐?'라는 질문을 곧잘 받는다. 나는 퇴임한 것이 그렇게 실감 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퇴임 전의 나의 생활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지난날의 직업을 완전히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지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퇴임하니 너무 좋다고 하던데' 하며 나의 말에 의아해한다. 나도 말하고 보니 이상하다. 분명 퇴임 후 생활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퇴임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대답하였지.

시골살이하면서 퇴임 전과 달라진 모습을 생각해 본다. 퇴임 후 시골살이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아침 일찍 일어나 냉온욕 하러 목욕탕에 가고, 적당한 시간에 집 뒤에 있는 산에 오르고, 책도 좀 읽고, 뉴스를 시청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이런 삶이 되풀이되다 보면, 오늘은 또 어떻게 보내지 하며 이런저런 생각도 할 것이다. 그럴 때 낯선 곳을 여행하며 다른 문화와 경치 그리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퇴임 후의 기쁨도 맛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듯하다. 여행도 이삼 년 하다 보면 이제 굳이 하는 생각도 들 것 같다.

또한 지인들과 연락이 닿으면 모처럼 술 한 잔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만남도 잠시 빈말에, 거듭되는 추억팔이에, 생각의 다름에, 돌아서는 길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한결같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시골살이하면서 여유 속에 안락한 삶을 기대했다. 자연도 즐기고,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지인들도 만나고, 가끔 여행도 하고 등등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그런데 막상 시골살이를 해보니 겨울을 제외하고 그럴 틈이 없다. 내 앞에는 늘 할 일이 놓여 있다. 굳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을 뜨면 해야 할 일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아침 물안개 집 앞에 큰 계곡이 흘러가기에 아침이 되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아침 물안개집 앞에 큰 계곡이 흘러가기에 아침이 되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 정호갑

눈을 뜨면 잠시 멍 하니 거실 창을 바라본다. 산과 산 사이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며 하루를 맞이한다. 정신이 들면 어제 일을 기록하고, 책을 잠시 본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쯤이면, 밖으로 나가 집 주위를 살펴본다. 눈에 거슬리는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은 계절마다 다 다르다. 지루할 틈이 없다. 굳이 건강을 위해 산에 오르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을 많이 움직인다. 지난달에 우리집에 첫 걸음 하신 장모님이 햇빛에 그을린 나를 보고 하신 첫 말씀이 '시골 영감 다 되었네' 이다.

앞마당의 잡초 현무암 사이로 잡초들이 끊임 없이 올라오고 있다.
앞마당의 잡초현무암 사이로 잡초들이 끊임 없이 올라오고 있다. ⓒ 정호갑

정원 잡초 잡초에 올해 심은 진달래와 달리아가 가려져 있다.
정원 잡초잡초에 올해 심은 진달래와 달리아가 가려져 있다. ⓒ 정호갑

눈에 거슬리는 부분들은 뭐니 뭐니 해도 잡초이다. 채소의 성장을, 꽃들의 아름다움을 가로막는 잡초들, 쉬이 다가설 수 없어 모른 척 미루어 두다 날을 잡아 작정하고 뽑는다. 그런데 한 번으로 끝나질 않는다. 돌아서 보면 또 올라온다. 이길 수 없다. 시골 정원이 도시 정원과 같을 수 있냐, 사람이 살고 있는 집처럼만 보이면 되지, 하고 대충 정리하며 합리화한다.

정원의 꽃과 나무들에 벌레가 보이면 친환경 살충제도 뿌리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집에서 만든 커피 거름도 준다. 비가 예보되어 있는 날이면 배수로를 점검한다. 처마 밑도 살펴보아야 한다. 벌집들이 보인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모기살충제를 뿌리고 빗자루로 벌집을 떼어낸다.

낙엽이 지고 나면 여름내 마구잡이로 올라온 나뭇가지들도 잘라 준다. 겨울을 이겨날 수 있도록 낙엽으로 보온도 한다. 야외 수도도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감싸 준다. 눈이 오면 마을 길의 눈도 치운다.

저기에 이 나무나 이런 꽃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땅을 파고 나무와 꽃들을 사와 심는다.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습해 나무와 꽃들이 자라지 않고 잡초만 무성한 곳이 있다. 이 부분은 잡초를 걷어내고 현무암과 파쇄석을 깔아 쾌적한 곳으로 만든다.

잔디마당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이쁘다. 이곳에 쉼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잔디를 걷어내고 쉼터를 만든다. 정원을 가꾸다 보니 정원용품이 많이 생겼다. 둘 곳이 마땅찮다. 창고를 주문하여 조립한다.

이렇듯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내 손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뿌듯하다. 못 하나 칠 줄 모르던 내가 이제 드릴을 만지고, 삽으로 땅을 파고, 전지가위로 나무를 자르고, 잡초가 우거진 곳은 예초기를 돌린다.

저녁놀 하루의 힘듦을 보상해주는 저녁놀.
저녁놀하루의 힘듦을 보상해주는 저녁놀. ⓒ 정호갑

일을 마치고 나면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변화에 만족하고 스스로 흐뭇해한다. 일을 마치고 바라보는 저녁놀은 힘든 하루를 보상하여 준다. 나도 이렇게 마무리를 할 수 있었으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 지난 날을 잊다

봄에는 올라오는 새순과 꽃을 보며 감탄한다. 겨울을 이겨내고 올라오는 새순은 그야말로 신비롭고, 희망을 가득 안겨준다. 봄 햇살의 따스함을 받아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의 색과 향기는 사람을 편안하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해준다. 가끔은 꽃과 양서류의 조화에 그저 묘한 아름다움을 맛보기도 한다.

붓꽃과 청개구리 붓꽃에 살포시 앉은 청개구리.
붓꽃과 청개구리붓꽃에 살포시 앉은 청개구리. ⓒ 정호갑
꽃을 좋아하면 나이가 들었다고 한다. 지인들이 찾아와 정원을 둘러볼 때 다양한 달리아 이름을 말하고, 꽃의 특징도 알려준다. 빨간 꽃은 장미, 하얀 꽃은 백합, 소나무, 대나무가 전부였던 내가 이렇게 정원의 꽃들과 나무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에, 내가 언제부터 하며,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분홍상사화 구근 30개를 집 둘레에 심었다. 6월까지 싹이 올라오고 잘 컸는데,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어도 꽃대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는다. 분홍상사화의 은은한 아름다움에 빠져 여기저기 있는 구근을 모아 한 곳으로 옮겨 심었는데 이럴 수가. 시골 정원에 너무 잘 어울려 기대했는데 아쉬움이 크다.

봄에 여름 정원을 장식할 배롱나무도 한 그루 심었는데 역시 꽃을 피우지 않는다. 꽃과 나무들이 자리 잡도록 기다려 주어야 하는데,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성급함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기다림은 사람의 인품을 완성하는 마지막 관문이 아닐까?

정원에 핀 국화 한 해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꽃, 국화. 오상고절이 그대로 와닿는다.
정원에 핀 국화한 해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꽃, 국화. 오상고절이 그대로 와닿는다. ⓒ 정호갑

무더위가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선선해질 때쯤이면 피어나는 국화. 꽃의 색도 맑고 깨끗할 뿐 아니라 향기도 좋다. 오상고절(傲霜孤節), 찬 서리가 내리는데도 피하지 않고 거만하게 외로이 절개를 지킨다. 국화에 딱 들어맞는다.

서리가 내리면 겨울이 머지 않았다는 알림이다. 다른 꽃들은 겨울의 추위를 피해 자취를 감추었을 때 국화만 홀로 피어난다. 그 삶을 따르고 싶지만, 그저 바라보며 부러워할 뿐이다. 그 향이나마 오래 간직하고 싶어 국화차를 만들며 가을을 보낸다.

꽃들은 저마다의 개성으로 피워낸다. 색과 향기, 모양, 크기, 시기를 모두 달리한다. 그런 꽃들을 보며 순수함을, 고결한 품격을, 소박함을, 화려함을, 열정을 읽으며, 그저 감탄하고 감탄한다.

아내는 1000원을 주고 산 채소 모종들이 텃밭에서 잘 자라나 시장 역할을 하는 것이 너무 재밌다고 한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아왔던 시장에 다녀올게요, 하면서 텃밭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자기가 직접 그렇게 하니 너무 재미있단다.

마을 설경 뒷마당에서 바라본 마을 설경
마을 설경뒷마당에서 바라본 마을 설경 ⓒ 정호갑
겨울 한철은 설경의 아름다움에 빠져 내가 꿈꿔 왔던 시골살이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설경을 거실에 앉아서도, 이곳저곳을 옮겨가면서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우리집을, 우리 마을을 설국으로 만들어 준다. 거실에서 바라보는 설국, 앞마당 뒷마당에서 바라보는 설국, 마을 길을 거닐며 바라보는 설경이 모두 다르다. 황홀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고 또 본다.

이렇게 시골살이하다 보면 송순의 <면앙정가> 한 구절이 저절로 떠오른다.

속세를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이하려 하고,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진 꽃은 누가 쓸겠는가. 아침이 부족하니 저녁이라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여유가 있겠는가.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을 걸어 보니, 번거롭고 수고로운 마음이지만 버릴 것이 전혀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 퇴임 전이나 퇴임 후나 한결같이 앞에 놓여 있기에 그 일을 한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이지만, 버리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하기에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 감각으로 느끼며 맛보고, 자연의 섭리를 배우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 퇴임을 하지 않았다.

#시골살이#퇴임전#퇴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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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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