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사회제도 설계하기
지난 7월 25일 정부가 발표한 '2024년 세법 개정안'에 의하면 "중산층 보호"를 위해 상속세를 낮추고 "자본시장 발전"을 위해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를 폐지할 방침이라고 한다. 정책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이해관계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무인도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숙의를 거쳐 새로운 사회제도를 설계한다고 할 때 어떤 세제에 합의할지 예상한 다음, 합의된 원칙에 따라 세법 개정안을 평가해 보자.
만일 국민의 공동자산이 있다면 최우선적인 정부 재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에 쉽게 합의할 것이다. 무인도의 토지와 천연자원은 공동자산의 대표적인 예다. 공동자산의 사용권을 개인에게 부여한다면 그 사용료를 정부에서 징수하면 된다. 또 자연환경 역시 국민 공동자산이므로, 누군가 이를 훼손하면 피해액과 복구 비용도 징수하면 된다. 원래 공동체의 것을 공동체에 귀속시키는 수단을 '조세'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조차 어색하지만, 일단 0순위 조세라고 해두자.
국민 공동자산만으로 정부 재원을 충분히 조달하지 못한다면 다른 과세 대상을 물색해야 한다. 현실에서 조세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 소득이 있어야 과세할 수 있으므로, 과세 대상을 소득으로만 단순화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각종 소득 중에서 사회가 보호·장려해야 할 소득은 정직한 땀으로 벌고 당사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도움이 되는 소득이다. 그렇다면 '생산적 노력 + 사회적 기여'라는 조건을 갖춘 소득은 마지막 과세 대상으로 하고, 이 조건으로부터 거리가 멀수록 우선적인 과세 대상으로 하자는 원칙에 주민들이 합의할 것이다.
과세 대상의 우선순위: 국민 공동자산 → 특권에 의한 소득 → 운에 의한 소득
노력과 기여에 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는 힘 또는 사회적 지위를 '특권'이라고 부른다면, 소득 중에서 '특권'으로 얻는 소득을 1순위 과세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에 합의할 것이다. 특권에 의한 소득은 결국 다른 사람의 생산적 노력의 결과를 '이전' 또는 '가로채기'해서 얻는 소득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완전경쟁시장에서는 이런 소득이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경제 권력을 쥔 대기업 간부들이 챙기는 고액 보수, 공급이 제한된 의사들이 버는 고소득 중 상당 부분이 바로 특권에 의한 소득이다.
0순위 및 1순위 가치를 경제학에서는 '지대'(economic rent)라고 한다. 지대를 징수하더라도 그 생산요소의 공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대는 가장 시장친화적인 과세 대상이라고 교과서에 나온다. 지대소득은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거나 '이전' 당한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게 바람직하지만, 그런 조치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과세하여 국민 모두를 위해 사용하면 된다.
'특권에 의한 소득'에 대한 과세로 부족하다면,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운이 좋아 얻는 소득, 즉 '운에 의한 소득'이 2순위 과세 대상이라는 원칙에도 합의할 것이다. 운의 예로는 선천적 자질, 생장 환경, 기타 우연이 있다. '운에 의한 소득'은 '특권에 의한 소득'과 달리 다른 사람이 노력해서 생산한 결과를 가로채지 않으므로 특권소득보다 후순위 과세 대상이 된다.
2순위 과세로도 재원이 부족하다면, 비로소 3순위로 '노력+기여에 의한 소득'에 과세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이상, 무인도 주민이 합의할 것으로 예상되는 과세 대상의 우선순위를 요약하면, 국민 공동자산(0순위) → 특권에 의한 소득(1순위) → 운에 의한 소득(2순위) → 노력+기여에 의한 소득(3순위)이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의 조세제도는 이런 순위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 0순위에 가까운 종합부동산세를 낮추려고들 하고, 1순위와 2순위의 상당 부분을 방치하면서 3순위인 부가가치세를 정부의 주요 재원으로 삼고 있다.
'상속세 감세'와 '금투세 폐지'는 설득력이 없다
무인도 주민이 합의할 과세의 우선순위에 비추어, 정부가 계획하는 상속세 축소와 금투세 폐지 정책을 평가해보자. 상속세의 경우, 후손에게 물려주는 유산이 오로지 피상속인의 '노력+기여에 의한 소득'으로만 형성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를 물려받는 상속인에게는 모두 운에 의한 불로소득이 된다. 그렇다면 상속세의 우선순위는 2순위와 3순위 사이에 있다. 따라서 상속세율을 100%에서 조금이라도 낮추려면, 그에 앞서 3순위인 '노력+기여에 의한 소득'에 대한 과세를 전면 폐지해야 원칙에 부합한다.
금투세는 증권거래세를 없애는 대신 금융투자로 얻은 이익이 연 5천만 원을 넘는 경우 초과분의 20% 내지 25%(지방세를 포함하면 22% 내지 27.5%)를 거두는 세금이다. 지난해 1월부터 시행할 예정이었으나 2년간 유예된 상태다. 금융투자는 기업의 자본 조달에 기여하는 측면도 일부 있으므로 금투세는 상속세보다 후순위이다. 그러나 온전히 노력과 기여에 의한 소득은 아니라는 점에서, 금투세를 폐지하려면 종합소득세 중 3순위에 해당하는 부분을 먼저 폐지해야 한다. 또 금융자산에서 생기는 소득에 부과한다는 점에서 금투세와 다를 바 없는 이자소득세를 그대로 두는 것도 이상하다.
무인도 주민들도 특별한 정책적 필요성이 있다면 우선순위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하겠지만, 이런 예외에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나라살림연구소가 8월 15일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상속세 총액의 90%를 납세자 상위 1%가 부담하였고, 그 실효세율은 13.9%에 불과하였다. '중산층 보호'를 위해 상속세를 낮춘다는 명분은 설득력이 없다.
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월 "금투세를 폐지하지 않는다면 증시에서 엄청난 자금이 이탈될 것"이라며 "1400만 개인투자자들의 막대한 타격이 예상된다"고 하였다.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 '외국으로 자본이 유출된다'던 반대쪽 주장처럼 부실하다. 상속세 축소와 금투세 폐지도 '의대 증원'처럼 세심한 준비 없이 던지는 '어퍼컷' 정책이 아닌지,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 온 부자 감세의 위장술이 아닌지 걱정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구지역 인터넷 매체 <평화뉴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