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게 바빠서, 일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된 여름 휴가도 못 갔다. 아이는 별생각이 없지만 엄마인 나는 남들 다 가는 여름 휴가를 못 간 게 마음에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점심시간에 딸에게 "오늘 엄마랑 파자마 파티 할까?"라고 카톡 메시지를 남겼다.
카톡이 오는지 전화가 오는지도 모르던 딸은, 다녀와야 하는 모든 학원을 마치고서야 "엄마, 카톡 보냈네"라고 집에서 내 얼굴을 보며 말한다. 반색을 하며 "파자마파티? 그게 뭐야?"라고 묻는다. 나도 해본 적 없어 모르지만 "그거? 잠옷 입고 파티하는 거지"라며 하나마나한 말을 한다.
딸에 말에 의하면 이날은 '불타는 금요일'이다. 그리고 우리 딸이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서진이네>가 하는 날이기도 하다. 다른 날과 다르게 부지런히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딸은 파티니깐 과자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집에 있는 과자를 그릇에 덜어 두고 우리 둘만의 파자마 파티를 시작한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은, 요 근래 부쩍 얼굴에 특히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다. 피부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머릿결 관리도 하고 싶다고 한다. "나도 00 친구처럼 얼굴이 하얗고 싶어" 라든지 "00 친구는 머릿결이 보드랍던데 나도 차분한 머릿결이 갖고 싶어"라고 말하곤 하던 게 생각나 파자마 파티에 더해 '엄마표 뷰티숍'을 오픈했다. 이름만 대단하지 여름철 냉장고에 있는 오이를 얇게 썰어 미리 준비해 두었다.
바닥에 베개를 두고 누우라고 한 후 헤어 밴드를 씌워준다.딸과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랄랄'님의 흉내 내면서 딸의 작고 예쁜 얼굴에 오이를 하나씩 붙여준다. 딸은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온 오이가 너무 차갑다고 깔깔대면서 발버둥을 친다. 나는 "고객님, 진정하세요. 움직이시면 안 되세요"라고 말한다. 상황극에 익숙한 딸도 "실장님, 알겠어요"라면서 내 말에 맞장구를 쳐준다.
오이를 붙이면서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내가 낳아서 그런지 안 예쁜 곳이 없다. 내가 보기엔 까무잡잡한 피부도 건강해 보여 나는 맘에 든다. 헤어 밴드를 해도 삐져나오는 잔머리들은 왜인지 사랑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성적표와 얼굴
아이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의 변해가는 얼굴보다 성적표를 더 유심히 들여다봤던 것 같다. 이런 시간을 갖게 되니 문득 아이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난다.
그때 아이는 손수건 한 장으로 온몸을 덮일 정도로 작고 조그마했는데, 어느새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몸이 점점 여성스럽게 변해가고 있다. 나보다 작았던 손과 발도 어느새 나와 비슷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 키도 나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내년이 되면 파자마 파티는 나 말고 친구들이랑 하고 싶다고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딸이 부모를 떠나는 시기, 언젠가 독립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오는 게 맞다(떠나는 시기가 안 오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다). 그래도 괜찮다. 전문가가 그랬다. 아이를 집에 온 '귀한 손님'이라고 생각하라고 말이다. 손님은 우리 집에 왔다 며칠 머무를 수는 있지만 반드시 다시 본인의 집으로 간다. 아이도 그럴 것이다.
아이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남의 집 애들처럼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열심히 하길 기대한다거나, 남의 집 애들처럼 공부나 운동에 소질이 있길 바란다. 우리 아이가 남의 집 애들보다 뛰어났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욕심이 생길 때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
가끔 생각한다. 아이는 내가 '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온 것 같다고. 내가 낳은 내 아이라고 해서, 그냥 어른인 내 성격대로 대하거나 혹은 내 마음대로 해선 안 된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공부할 때 나는 아이가 '100점 맞겠다'는 마음으로 하면 좋겠는데 아이는 반대로 '0점만 안 맞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한다고 한다. 다른 애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꼴찌만 아니면 된다는 딸의 마음이다. 이럴 때 보면 나와 딸은 동상이몽이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 마음도 급한 편이다. 아이가 내 마음처럼 따라오지 않을 때 마음은 급하지만 아이에게 좀 돌려가며 천천히 말해주고 기다려주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배우기 어려웠던 '인내'와 '내려놓기'를 저절로 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는 중이다.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라고 하는데, 부모에게도 아이가 우주인 건 마찬가지 아닐까. 요즘 사회적으로 저출산 시대라고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내게 있어 아이는 내 인생의 선생님,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귀한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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