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기자말] |
프랑스 혁명의 고갱이는 단연코 단두대다. 이로써 봉건이 해체되고, 공화정이 열려 자본주의 맹아가 싹텄다. 반면 동학혁명은 거기까진 이르지 못했다. 왕의 목을 베지도 봉건을 해체하지도 못했다. 둘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었으니, 바로 제국주의다.
청일전쟁이 한반도 쟁탈전이라면, 러일전쟁은 만주를 놓고 다툰 국제전이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두 전쟁에 다분히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청일전쟁은 방관자에 가까웠다.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면, 배후 조종만으로 한반도에서 이익은 보장된다고 보았다. 일본이 승리한다 해도 외교적으로 타협할 지점이 상당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러일전쟁은 차원이 달랐다. 부동항을 찾아 끊임없이 남하하는 러시아는,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이며 세계 곳곳에서 다투는 존재였다. 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이 어느 편에 섰으리라는 건 명확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동학혁명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혁명은 진압되고, 조선은 누구이건 속국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부랴부랴 조선과 수교에 나설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무엇보다 일본이 침략적 제국주의에 편입하려는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일전쟁은 그 리트머스였던 셈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에 반발한'3국 간섭(1895.04)'이 그 방증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주 국가를 세우려 싸웠던 동학혁명 패배가 그래서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다시 피어나는 녹두꽃... 법관과 나눈 치열한 대화
우금티 학살은 월등한 무기와 화력을 앞세운 일본이, 조선을 대리하여 저지른 명백한 범죄였다. 동학혁명에 나선 농민군은 기꺼이 장렬한 최후를 맞았고 이는 자주적 민족운동의 지향과 나쁜 권력에 대한 항쟁, 그리고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민중은 항일 무장 의병으로, 3·1운동의 주 항쟁 세력이었다. 또한 1920년대부터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국내에서도 저항적 민족주의의 모태가 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소작쟁의 등 일본의 수탈에 저항하는 주체세력이었다.
특히 전라도에서는 동학혁명이 혈연적이고 실존적인 실체로 작동하였다. 이는 부·조부 등 동학혁명에 참여한 가족 이력이 광주학생운동으로 암태도 소작쟁의로 이어졌고, 지리산을 근거지로 항일 빨치산 투쟁을 이어간 뿌리가 되었다.
민족·민주·자주를 지향하는 변혁 세력이 거세되어버린 해방 이후, 꿋꿋한 진보의 정신적 기반이기도 했다. 동학에서 태동한 항쟁 및 해방운동의 전통과 맥락은 4.19와 광주민주화운동에도 잇닿아 있다. 이처럼 동학혁명이 피워낸 녹두꽃은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끊임없이 피어날 것이다.
이때 전봉준은 전시에 다리가 상한 바 되어 짚둥우리에 누워 있는 채 그대로 법정에 들어왔다. 법관들은 좌우 나졸을 호령하여 일으켜 앉히라 하였다. 전봉준은 말하되, "내 능히 알지 못하노니 너희는 할 말이 있거든 아무렇게나 말하라."
<법관>
네 일개 죄인이라 어찌 감히 법관의 앞에서 이같이 공손하지 못한가.
<전봉준>
네 어찌 감히 나를 죄인이라 말하는가.
<법관>
소위 동학당은 나라가 금하는 바라 네 감히 도당을 …(중략)… 대군을 몰아 왕성을 핍박하고 정부를 부수어 버리고 새 나라를 도모코자 하였나니 이는 곧 대역불궤의 죄를 범한 것이라, 어찌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가.
<전봉준>
도 없는 나라에서 도학을 세우는 것이 …(중략)… 동학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고자 하는 자니 탐욕스럽고 포악한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조상의 뼈다귀를 울러 험상스럽고 모진 짓을 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를 없애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짓과 국토를 가지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를 징계하는 일이 무엇이 잘못이냐. 너희는 외적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해하려는 무리다. 그 죄 가장 중대하거늘 도리어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법관>
네가 애당초 거사 때 국태공(흥선대원군)과 서로 연락이 있었느냐.
<전봉준>
대원군은 또한 권세를 가진 자로서 어찌 하찮은 백성을 위한 동정이 있었으리오.
<법관>
네만일 연락이 없을 진데 어찌하여 척화척양의 깃발을 세웠느냐.
<전봉준>
그것은 온 나라가 다 일반이라 어찌 동학의 거사를 대원군 한 사람에 한정하여 그 뜻이 있는 바라 이르느냐.
이때 법관이 갖은 악형으로 심문을 거듭하였었다. 전봉준은 사색을 조금도 변치 않고 말하여 왈 "너는 나의 적이오,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것일 뿐이오,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하고 이에 입을 다물고 말았었다.
법관은 하릴없이 심문을 마치지 못하고 전봉준을 옥에 내려 가둔 후 다시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방서 등 4인을 불러 다음 순서로 심문하였으나 그네들의 진술은 한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이구동성으로 창의문과 같은 뜻을 말할 뿐이오, 다른 말이 없어 모두 옥에 내려 가두고 …(중략)…
전봉준의 상한 다리를 일본인 병원에서 치료케 되었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죄상은 일본 법률로 의논할 것 같으면 상당한 국사범이라 사형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할 수도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일본인 변호사에게 위탁하여 재판을 받아 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또는 일본 정부에 양해를 얻어 활로를 구함이 좋지 아니하냐"고 회유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전봉준은 말하되 "내 구구한 생명을 위하여 활로를 구함은 본의가 아니다" 하고 일본인의 말을 거절하였다. 전봉준 등 재판은 갑오년 겨울로부터 을미년 봄까지 수차의 심문이 있었으나 끝까지 다른 말이 없고 다만 적의 법을 받지 않겠다는 말로써 거절할 뿐이었으므로 심리는 구체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치 못하고 필경 법관이 자기 직권으로써 편협한 판결을 지어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방서 등에게 아울러 사형을 선고하였다. (동학사. 오지영. 문선각. 1973. p265~269)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은 역사와 민중 앞에 떳떳했다. 사실상 일본의 재판이었음에도, 당당하게 사형을 받아들였다. 수십 만 명이 희생된 무거운 역사의 짐을, 이들은 당당하게 짊어지고 갔다.
전봉준 의미하는 '새야 새야, 팔왕 새야'
노래는 시대의 창이다. 노래가 시가 되고 그림이 되며 춤사위가 되었다가, 이내 삶과 노동으로 승화하여 생활 깊숙이 자리한다. 순리다. 따라서 노래는 결단코 멈추거나 끊이지 않는다. 세대를 넘겨 불리고 노래의 정신에 따라 삶도 이어진다. 그렇게 면면히 이어져 오는 것이다.
동학혁명이 끝난 뒤 전주, 고창, 정읍, 김제, 부안에서는 동학과 녹두장군 노래가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여, 지금도 일상처럼 불리고 있다.
노래 중 몇은 널리 알려져, 그 절절한 한을 시처럼 기억하기도 한다. 그들이 죽음으로 부른 노래가, 역사와 민중의 길라잡이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일찍이 조선 안에 동요가 있었는데 아래와 같다.
「새야 새야 녹두 새야 윗녘 새야 아랫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 새야 함박 쪽박 열 나무 딱딱 후여」
이 노래는 …(중략)… 세상에 유행하여 여러 애들이 벼밭에서 새 떼를 모으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것은 전봉준 선생의 아명이 녹두라 하여 이 동요가 예언으로 나온 것이라고 전설이 분분하였었다.
「새야 새야 녹두 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사 울고 간다」
또 한 가지 노래가 있었는데 그 노래는 이와 같다.
「새야 새야 팔왕(八王) 새야 너 무엇 하러 나왔느냐 푸릇푸릇 여름인가 하였더니 백설이 펄펄 흩날리니 저 건너 청송녹죽(靑松綠竹)이 날 속인다」
이 노래는 팔왕은 전(全)을 의미한 말이오, 청송녹죽은 동학당의 새로운 기운을 말함이오, 백설은 시기가 아직 일러 궁핍한 한겨울 차가운 눈만 내리는 계절이어서 봄소식이 미처 돌아오지 못함을 의미함이라. (앞의 책. p275~276)
찬연한 혁명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한과 함께 스러져 갔다. 자주적 근대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웅대하고 뜨겁던 의지마저 짓밟힌 건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밝히며 삶과 노동, 평화와 변혁에서 통일의 희망으로 살아있다. 사람다운 삶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타오르는 불꽃이다. 끝내 꺼지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일깨워 줄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