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 이야옹!"
"어째 뭘 달라구~! 찡찡아 왜 뭐 줘?!"
발코니 앞에서 얌전히 두 발을 모으고, 순한티 쫙쫙 흐르는 얼굴로 '야~옹' 하는 찡찡이를 삼순이 할머니가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 매서운 더위가 한풀 꺾였지만, 아직도 한낮이면 햇살이 따갑다.
눈부시도록 맑고 아름다운 가을을 향해 시침이 바삐 달린다. 밤낮으로 삶아대던 더위도 때가 있다더니 딱 그 짝이다. 햇살 들어올 틈 없이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었던 포도나무 넝쿨도 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그 사이로 손바닥만하게 듬성듬성 하늘이 보인다. 맑고 투명하다. 그리고 깨끗하다.
할머니의 특별 '그늘 디자인'
너른 발코니 위 두 개의 의자에 우산이 하나씩 묶여있다. 할머니의 특별한 '고양이 서비스'이다. 넝쿨이 만든 그늘이 시원도 하지만, 해 그늘이 지면 볕이 옆으로 드니 햇볕도 막고 소나기라도 내리치면 피할 수 있게 만든 '비 가림 시설'이자 '그늘막'이다.
이 의자의 주 사용자는 암고양이 호순이, 찡찡이이다. 몇 해 전 알츠하이머를 앓으시면서 할머니는 웰시코기 '사랑이'와 두 마리 고양이랑 함께 사신다. 자녀들은 멀리 타지에 사니 사람 발자국이라곤 택배 아저씨와 우체국 집배원, 그리고 매달 한 번씩 방문하는 전기검침원뿐이다.
할머니는 실상 고양이를 좋아하지는 않으신단다. 어느 날, 새끼 고양이 나비가 마당에 들어와 우는데 갓 젖을 뗀 너무도 어린 고양이라 급히 밥 한술 물 말아 주었는데, 어찌나 허겁지겁 먹던지 그때부터 매일 밥을 밖에 두었다고 하신다. 일단 어느 정도는 성장해서 험한 세상을 헤쳐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속도 모르고 그런 나비가 아예 눌러앉은 것이다. 정을 주면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보면 통한다고 했던가. 홀로 있는 나비가 외로워 보였던 할머니는 길고양이 '호순이'까지 입양을 했다. 나비를 위해서.
성깔이 까칠해서 손도 댈 수 없었던 호순이이지만 나비에게는 상냥한 고양이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고양이는 달 밝은 밤에 온 동네를 싸돌아다니며 마실을 다녔고, 시원하게 바람이 부는 날이면 하늘을 이불 삼아 늘어지게 잠을 잤다.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함께 쥐를 좇고 참새도 잡았다. 오갈 곳 없는 이 고양이들에게 할머니 집은 더할 나위 없는 살만한 도시이자, 낭만 가득한 둘 만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언제든지 산책 나갈 쾌적한 산야, 풍족한 먹거리, 편히 쉴 집, 그리고 언제나 함께할 수 있는 짝꿍까지 있으니 도시를 잘 택한 것이다. 두 마리 고양이들을 지켜보는 것은 할머니에게도 쏠쏠한 기쁨과 뿌듯함이었다. 일종의 작고 건강한 커뮤니티가 형성된 것이다.
"아이고 저리도 좋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지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아야지."
삼순 할머니는 늘 그리 말씀하셨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
호순이 입양으로 만나게 된 호순이 엄마와 삼순 할머니는 모녀처럼 가까워졌다. 호순이 엄마는 한 달에 두세 번은 꼭꼭 들러 할머니와 고양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호순이 엄마는 몇 해 전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세상에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이 있다. 동생이 키우던 고양이를 돌보다 고양이 엄마가 되버렸다고 했다.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곱고 좋은 직장도 있다. 소위, 갖출 것을 다 갖춘 그녀이지만, 고양이들 속에 자신을 묻고 지낸 지 오래다.
그럼에도 삼순 할머니와는 궁합이 잘 맞는지 대화도 많이 하고, 가깝게 지낸다. 고양이가 맺어준 인연이다. 그녀가 구조한 고양이들을 삼순 할머니가 살뜰히도 돌보고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게는 위로인지도 모른다.
빈 자리는 다시 채워지고
얼마 전 나비가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났다. 마을에 나갔다가 쥐약이 든 음식을 먹었던 모양이다. 호순이가 일주일간 곡기를 끊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저리 있나…. 사랑하는 짝을 잃었는데…. 사람이나 짐승이나 매한가지야."
호순이 엄마가 암고양이 찡찡이를 데려왔다. 호순이처럼, 그리고 나비처럼 버림받은 길고양이다. 몇 달간은 데면데면하더니 이제 제법 가까워졌다. 밥도 같이 먹고 자리도 나누어 쓴다. 산사람은 산대로 살아간다더니만 고양이들도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야옹~ 야옹~!"
"멍멍멍!"
호순이 엄마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세 마리의 식구들이다. '앗 엄마다! 맛있는 간식이다!' 하는 것만 같다. 벌써 5년째란다. 호순이 엄마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삼순 할머니를 찾아온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안 되어도 들러 꼭 할머니와 고양이들의 안부를 확인한다.
호순이 엄마 온다는 소식에 삼순이 할머니는 냉장고를 뒤적이더니, 방아잎과 쑥갓, 부추를 뜯어 얼른 부침개 한 장을 부쳐내신다. 움직이는 할머니 발걸음이 경쾌하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는 오히려 활력이 되고 양분이 되는 것 같다.
그저 옆에 있어만 주어도
마당에 꽃을 다 꺾고 밟아놓는 반려견 사랑이를 보고 단단히 화가 난 할머니는 늘 말씀하신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너를 키우는지 모르겠다…. 아이고…. 얌전히 안 있어?" 하고 사랑이를 혼내시지만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자체가 큰 힘이고 위로다. 가족이 아니어도 서로를 챙겨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포도 덩굴 위로 동그란 달이 환하게 떠오른다. 할머니 등 뒤에는 사랑이가 껌딱지처럼 붙어 자고, 침대 아래에는 호순이와 찡찡이가 잠을 청한다.
저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지붕이 보인다. 누구나 한 지붕 아래 같이 살 수만은 없다. 그래도 하늘을 큰 지붕 삼아 서로 의지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낭만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아침이면 포도잎이 또 떨어질 테다. 그러나 그 사이로 햇살이 더 많이 비집고 들어오겠지. 해 그늘을 따라 인생이 흘러가지만, 세월의 사이마다 기쁨과 감사는 더 많이 우러날 테다. 우물펌프질을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물을 주고 싶었던 윗세대들의 마음처럼 조금 더 베풀고 조금 더 배려하는 그런 도시가 되면 좋겠다. 낭만은 잔잔한 울림과 사람의 향기가 있어야 낭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