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른들이 '속시끄럽다'는 말을 쓰시곤 했었다. 어릴 적에는 '왜 속이 시끄럽지?' '그게 무슨 뜻이지?' 했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그 말이 자연스레 이해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상념들이 달려든다. 간밤의 꿈인지 기억나지도 않지만 여운만은 개운치 않게 남아 맴돈다.
거기에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까지, 아침부터 가슴이 묵직한 경우가 많다. 독일 발도로프 교육 이론에서는 밤 사이 영혼이 우주로 갔다 잠이 깨면서 다시 '합체'가 되는데, 나이가 들어 기력이 떨어지면 그 '합체'가 원활치 않아 아침이 힘들다더니. 우주를 헤맨 건지 과거를 헤맨 건지 늘 아침이 무겁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하루 종일 말 그대로 '속 시끄럽게' 이런 저런 생각들에 시달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마음 속에서 저마다 자기 주장을 하며 하루 종일 떠들어 대는 생각과 그로 인해 부추겨지는 감정들에 지쳐버린 날이면, 내가 못살겠다 싶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이 시끌벅적 영화 <인사이드 아웃>이 떠올랐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 1>은 우리 안에 여러 감정이 공존함을 '시인'했다. 그 중에서도 슬픔이를 각인시켰다.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어른들이 더 열광적으로 반응했던 영화, 사람들은 <인사이드 아웃 1>으로 부터 자기 안의 슬픔에, 나아가 자신의 감정에 조금 더 솔직해 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슬픔이라는 부정적 감정이 기쁨이라는 긍정적 감정과 힘을 합쳐 상황을 해결해 나가며 우리 안의 슬픔이라는 감정에 '긍정적 메타포'를 부여했다. 꼭 <인사이드 아웃>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십 여년이 흐르고 기쁨이와 슬픔이로 대변되는 감정들은 보다 세분화되어 돌아왔다. 이번 <인사이드 아웃2>에서 가장 주목 받은 건 '불안', 그 밖에 부럽이, 따분이, 당황이, 추억 등이 더해졌다. 술픔이라는 어찌 보면 담백한 감정이 불안, 당황 등 보다 복잡한 요소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2024년의 시대, 기쁘고 슬프다는 단순한 감정적 상태를 넘어 불안과 우울이 더 시대적 화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영화는 잘 반영해낸 것이다.
이렇게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는 그때까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여기던 감정조차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의미한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머리 속에 다양한 감정들이 공존하여 산다는 설정은 나를 지배하는 지금의 이 감정만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여 2021년부터 방영된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 시즌 1,2 역시 김고은의 머릿 속에 10 명도 넘는 '이성, 감성, 응큼, 불안' 등의 세포가 아웅다웅하며 유미의 일상사를 이끌어 간다.
심리 상담사 야나가와 유미코가 쓴 <불안한 사람도 마음이 편해지는 작은 습관>에 보면 실제로 내 안에 많은 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유미코 씨는 여러 마리 강아지를 키우고 있다 생각하라고 한다. 꼭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의견', 흑백 논리를 따지는 '비판견', 난 이것도 못해하는 '패자견', 어쩌지 하는 '걱정견', 모든 일은 내 탓이오 하는 '사과견', 잘 될리가 하는 '포기견', 마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무관심견' 등이다.
<인사이드 아웃>이나, <유미의 세포들>, 그리고 <불안한 사람도 마음이 편해지는 작은 습관> 등을 보며 그러면 나도 '속 시끄러운 내 안의 마음들에 이름을 붙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저 작품들 속 캐릭터들을 보면 비슷한 듯 하면서도 또 등장 인물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어릴 적 라일리와 사춘기의 라일리가 다르고, 성인이 되어 연애사에 고심하는 유미가 또 다르다. 심리적 기제에 방점을 둔 <불안한 사람도~>의 강아지들도 또 다르다. 그래도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귀여움'이 아닐까? 내 안의 다크한 마음들도 귀여운 캐릭터나 강아지가 되어 불러주면 얼마간 그 '시름'이 희석되어 지지 않을까?
내 안의 마음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어떨까
그래서 엉뚱하지만 나 역시 내 안에 오고 가는 감정과 생각들에 어울리는 캐릭터가 무엇이 있을까 고심해 보았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곰돌이 푸>는 어떨까? 소심하지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피글렛과 부정적이지만 알고 보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당나귀 인형 이요르,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낙천적인, 그래서 사고뭉치가 되는 티거, 이런 곰돌이 푸 속 캐릭터들이 내 맘 속에서 오가는 마음들을 대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내 사주명식에서 등장하는 동물들을 소환하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다. 내 안에서 때로는 날뛰고, 때로는 침잠하며, 종종 외로워하는 마음들을 그 동물들의 이름으로 불러주면 어떨까 싶었다. 검은 쥐는 한없는 우울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데릭>의 쥐처럼 세상의 생각을 모으고 또 모아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몽상가 시인' 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날뛰는 내 안의 말에게는 <손오공>속 삼장법사의 백마를 떠올리며 너는 이제 늙은 말이야 하며 달래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 마음과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재해석을 곁들여 보는 것이다.
읽다보면 이게 다 뭔가 싶기도 하겠다. 하지만 얼핏 우스운 해프닝을 통해 내 안의 마음에 캐릭터를 찾아주는 과정은 그래도 꽤 쓸만하다.
무엇보다 우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인해 요동치고 있는가를 헤아려 보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질풍노도를 겪는 내 마음이 정확하게 무엇인가 정의 내리지 못한 채 혼돈에 빠지기도 하니까. 잠깐은 불안 때문인 줄 알았는데, 잘 살펴보니 갈망이나 열망이요, 또는 조급함인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또한 저렇게 내 안의 우후죽순 솟아나는 마음들에 이름 붙여주기를 하게 되면 어느 새 그 감정과 나 사이에 '여유'가 생겨난다. 이름을 붙여주려면 들여다 보고 살펴보아야 하니, 그 감정에 휘말려 어쩔 줄 몰라하던 마음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늘 성공적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애써본다는 게 중요하다. 이름을 불러주고, 갸륵한 그 마음을 보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안에 너무도 많은 나와 사이좋게 지내는 길을 모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