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편집자말]
 얼마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얼마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을까 ⓒ pxhere

몇억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친구들과 마주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A가 "아무리 그래도 100억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자, 나는 100억이 너무 꿈같은 숫자라 화들짝 놀랐다. 강남에 아파트 한 채 값이 얼마인 줄 아느냐고, 번듯한 집 한 채 사고 여유 있게 살려면 100억은 있어야지. A는 우리에게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투로 타박했다.

나는 강남 아파트까지는 필요 없으니 30억쯤이면 충분할 것 같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 B는 5억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 5억이든, 30억이든, 100억이든 우리에게 없는 돈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누구 얘기 들었어?"로 이어지는 다른 지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화제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었다. 주식이, 코인이, 부동산이 '떡상'해서 부자가 된 젊은 나이에 은퇴족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고 산다는 지인의 소식은 왠지 모를 부러움과 낭패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도비는 자유예요!"라고 외치며 회사를 뛰쳐나오는 게 소원이라며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는 친구의 푸념에 함께 깔깔 웃다가 마음이 푸석거렸다. 소설을 쓰는 내게 "그래도 너는 돈을 떠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잖아"라고 말하는 또 다른 친구에게,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돈을 벌려면 하고 싶지 않은 다른 일을 해야 할 때가 많다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는 언제쯤 오느냐고 우리는 함께 울부짖듯 소리쳤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가 우선이라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유라는 말이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는 현재의 세태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경제적 자유'라는 기이한 자유

언젠가부터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속박되지 않을 만큼의 자산을 보유하고 직장이나 노동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삶,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자신의 부(富)를 과시하며 인플루언서가 되기도 한다. 수단, 목적, 가리지 않고 종잣돈을 모은 다음 자산을 불리고 불려 경제적 자유를 얻는다는 그들의 이야기는 솔깃하다.

인플루언서는 자산을 수십 배, 수백 배 불려낸 자신의 성공담을 전시하고, 그에게는 수많은 팔로워가 따라붙는다. 부자가 된 셀럽은 현재의 여유 있고 자유로운 삶을 과시하고,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신의 고생담을 곡진하게 들려준다. 마치 그것이 모범답안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게 누군가의 자산이 폭등하는 동안,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될 다른 누군가의 고통은 점점 지워지고 만다. 재테크에 무지한 채로 근로소득에 기대는 사람들, 땀 흘려 노동하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 시대에서는 그저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해 보인다.

 고 김남주 시인
고 김남주 시인 ⓒ 해남군

2024년, 김남주의 글을 다시 읽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유'라는 단어를 계속 곱씹게 됐다.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지만 김남주가 목청 높게 부르짖었듯이 자유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하늘에서 내리는 자선냄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자유는/ 위엣놈들이 아랫것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자유는 인간의 노동과 투쟁이 깎아세운 입상이기 때문이다/ 김남주, <자유에 대하여> 중에서

평생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사람, 자유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던 사람, 노동의 힘을 믿고, 노동자가 주인이 될 위치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외쳤던 사람, 우리가 지금의 자유를 누리는 건 분명히 그 어른에게 빚진 부분이 있는데, 이제 우리는 어렵사리 물려받은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는커녕 '경제적 자유'라는 기이한 말을 내세워 돈을 주인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김남주, <자유> 전문)

김남주는 만인을 위해 일하고, 피땀 흘려 싸울 때 인간은 더 자유로워지는 법이라고 시를 통해 말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그것도 가깝고 친밀한 관계의 특정인이 아니라 만인을 위해 아픔을 나눠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외침은, 그가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진다.

자유와 욕망을 혼동하지 말길

 <김남주 시전집> 표지
<김남주 시전집> 표지 ⓒ 창비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돈이 많으면 좋겠고, 돈에 속박되지 않는 삶을 원한다. 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살 수 있고, 맛있는 것을 마음 편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삶, 그런데 그런 걸 갖췄다고 해서 자유를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건 욕망이 아닐까. 돈이 넉넉했으면 하는 욕망, 욕망을 채웠다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건 결국 우리가 자본의 욕망에 종속된 노예라는 걸 고백해 버리는 꼴이 돼버릴 테니까.

겉으로는 정의를 부르짖고, 속으로는 잇속만 차리던 위선조차도 이제는 저버린 듯한 시대이다. 솔직해진다는 명목으로 자본 증식에 대한 게걸스러운 욕망을 숨기지 않고, 심지어 그것을 자유를 향한 마음이라고 숭배하는 건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욕망을 향한 도파민'보다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가치 있게 여겨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새 30년이나 지난 지금, 독재 정권을 비롯해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몸부림이 새겨진 그의 시를 읽으며 자유의 가치를, 노동의 힘을 다시 생각해 본다. 시인이 우리 곁에 조금 더 오래 남아있었더라면, 자유는 돈이 생긴다고 하사품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통렬하게 호통을 치셨겠지. 그런 어른이 남아있었더라면, 그랬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는 덜 졸렬한 사회가 되었으려나.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김유담 소설가입니다.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김남주#자유#김남주30주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