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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홍성군 갈산면 김좌진 생가가 세워진 장군의 동상이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 김좌진 생가가 세워진 장군의 동상이다. ⓒ 이재환

중국 각지를 돌며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난 유림은 길림성에 있는 정의부(正義府)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동안 듣고 보아온 결론이었다. 1924년 11월 24일 조직되어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1920년대 중후반 재만 독립운동을 주도한 단체이다.

하얼빈 이남의 40여개 현에 거주하는 한인을 기반으로 자치행정을 실시하고 의용군을 편성하여 무장항일투쟁을 벌였다. 지도부는 중앙행정위원회위원장 이탁, 중앙행정위원 현정경·지청천·이진난·김용대·김이대·윤병용·오동진·김동삼, 의용군사령장 이청천, 법무과 주임위원 황학수, 학무위원회 학무위원장 김용대, 교육과 주임위원 김관웅 등이었다.

정의부는 국내진공 작전을 비롯 여러 차례 무장투쟁과 만주에 거주하는 친일파를 척결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유림은 정의부에서 교육과 관련한 업무를 맡아 재만 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포 2세들을 위한 교과서 편찬, 교원양성에 힘을 썼다.

유림은 다시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서면서 아나키스트 김종진(金宗鎭)을 만났다. 그는 이을규(李乙奎)·김좌진 등 아나키스트와 새로운 운동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을규의 소개로 김좌진을 만났다.

김좌진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곳 해림소학교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어주었다. 이로부터 며칠을 계속해서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기본문제와 당면과제들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유림은 김좌진과 논쟁을 벌였다. 그 무렵 만주에서 민족진영과 갈등을 빚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사상적 방어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주석 1)

김좌진은 국내에서 신민회에 가입한 것을 필두로 독립운동에 나서 청산리대첩을 주도하는 등 무장독립투쟁의 지도자였다. 북만주에서 1925년 이전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의 옛 동지들을 규합하여 신민부를 조직하고, 1928년 2월 성안현에서 개최된 민족유일당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계의 거목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러시아에서 1917년에 폭발한 볼셰비키 10월혁명의 사상이 전파되었다. 중국 뿐만 아니라 조선과 일본을 비롯하여 우리 독립운동 진영에도 스며들었다. 레닌이 주도한 10월혁명은 식민지 해방론이 실천강령에 들어있고 실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면서 독립운동가 중에는 사회(공산)주의 신봉자들도 있었다.

유림은 김종진의 주선으로 독립운동의 방략을 둘러싸고 김좌진과 토론을 하였다.

유림은 김좌진에게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라도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김좌진은 "주의는 주의로라야 대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요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에야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 또 무슨 주장이라야 될 것은 아니다"고 반론을 폈다. (주석 2)

아나키즘을 조국독립의 이념체계로 수용한 유림에게 사회주의사상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였다. 두 사람의 논쟁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이를 토대로 각종 토론과 논쟁이 전개되었다. 김좌진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발언을 하였다.

이런 문제는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뿐 아니라 단결과 협동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 때에 자칫하면 운동자들 자체내부에 파란을 야기시킬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비록 동지들 사이의 격의없는 자리라 치더라도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이니까 이것은 시야(是也)·해관(海觀) 양 동지의 의견에 따라 연구문제로 하여서 보유 재검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주석 3)

훗날 아나키스트 정화암은 유림의 토론과 박식함을 들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본명은 유림인데 중국에서는 고자성이라고 그랬지. 우리가 1924년 북경에서 무련(無聯)을 창립할 때 그는 성도대학인가 성도사범대학인가에 재학하고 있어서 참가하지 못했지만 철저한 무정부주의자였어요.

내가 보기에는 유림은 아주 괴인입니다. 성격이 아주 괴이한 사람이죠. 그러나 학식은 풍부했어요. 외국어를 여러 개를 하고, 성격은 괴이했지만 구변은 좋았어요. 그저 임기응변해 나갈 때는 누구 하나 당해 낼 사람이 없었지요. 그런 구변에는 천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상해에서 김두봉의 집에 살 때 유림이 찾아왔었어요. 그때는 유림이 졸업한 뒤였지요. 그랬다가 한번 귀국했었지요. 국내에서는 "유림이라는 사람이 외국어도 많이 알고 학식이 풍부하다"고 신문에 크게 났었다고 해요. 중국으로 다시 나오면서 북만으로 우리를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주석 4)

주석
1> 김재명, 앞의 책.
2> 이을규, <시야 김종진선생전>, 33~34쪽.
3> 앞과 같음.
4> 김학준, 편집해설, 앞의 책, <혁명가들의 회상>, 298~29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유림평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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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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