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3월 김산(경북 김천)에서 군사를 일으켰던 허위는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따라 군대를 흩고 귀향한다. 그 후 1907년 9월 재차 의병을 일으킨다. 서울을 함락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허위는 경상도를 떠나 경기도에 주둔한다.
허위 의진(의병 부대)은 창의 직후인 9월, 연천군에서 우편취급소장 등 다수의 일본인을 포살하고, 포천군에서 일본군 70명을 소탕했다. 철원군은 전역을 장악했다. 맹렬한 활약 덕분에 허위 의진은 온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1908년 1월, 13도 연합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공격에 나섰다. 허위 의진이 선봉부대가 되어 동대문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연합의병군 본대가 늦게 도착한데다 무기와 군사 부족 등의 문제로 13도 연합군의 서울 진공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고, 의병부대들은 각각 근거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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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116주기에 돌이켜 보는 허위의 생애,
허탈하게 끝난 13도 연합 의병군 서울 총공격
실패로 끝나고 만 13도 연합 의병
허위는 경기 일원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귀대가 가장 손쉬웠다. 임진강 유역 농촌과 산마을로 돌아온 허위 의진은 계속 유격전을 펼쳤고, 한편으로는 제2의 서울 탈환 작전을 추진했다. 허위는 4월 21일 전국 의병대장들에게 다시 총궐기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서울에 있던 일본군 13사단 참모부는 한반도 북방에 주둔 중인 군사들을 모두 서울 교외로 이동시켰다. 일본에 있던 제6사단 보병 23연대와 제7사단 보병 27연대도 5월 7일 서울 근교에 배치됐다. 5월과 6월 사이 서울 주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허위는 민가에 은신한 채 제2 서울 탈환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경기도 양평군 산골마을 류동 박정연의 집이었다.
양평에 머물며 제2 서울 탈환 작전 도모
이 무렵, 김 아무개라는 의병이 일본군 경성 헌병대에 사로잡혔다. 그 의병은 악랄한 고문에 못 이겨 허위의 거처를 자백했다. 그런 일이 있는 줄 모르는 채 박정연의 집에 머물러 있던 허위는 6월 11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일본 헌병들은 마을을 집집마다 수색했다. 마지막으로 산비탈의 초가 세 채밖에 남지 않았다. 헌병들은 이곳을 포위한 후 집 안을 뒤졌다. 몇 사람이 심문을 받는 중에 허위가 헌병들에게 이끌려 나왔다.
그렇게 하여 결국 10월 21일, 허위 의병대장의 순국일이 다가오고 말았다. 일본인 승려가 불경을 읽어주겠다고 했다. 허위가 일본인 승려를 꾸짖었다.
"충의의 귀신은 마땅히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는 법이다. 혹여 지옥으로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겠느냐?"
한국인 검사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시신을 거둘 사람은 있습니까?"
허위가 대답했다.
"죽은 뒤 주검이 어찌될 것인지를 무엇 때문에 고민하겠나? 옥중에서 썩어도 좋으니 속히 사형을 집행하라."
그렇게 하여 허위는 일제가 항일지사들을 가두기 위해 세운 서대문형무소의 제1호 사형수가 되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음 시를 남겼다.
父葬未成(부장미성) 아버지 장례도 못 해드리고
國權未復(국권미복) 국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不忠不孝(불충불효) 충성도 효도도 못했구나
死阿暝目(사아명목) 죽어서도 눈앞이 캄캄하겠도다
검사가 확인했듯이 허위에게는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줄 친인척이 없었다. 맏형은 작년에 이승을 떴고, 함께 의병 활동을 해온 셋째형 허겸은 얼마 전 허위의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이곳에 있다가는 어린 아이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달려온 제자
허위는 '죽어서도 눈앞이 캄캄하겠구나!'라고 했다. 서대문형무소로 달려온 박상진도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만사가 답답하고 괴로웠지만 출중한 스승을 쳐다보는 것을 낙으로 삼아 지금껏 살아왔다. 어디에 가도 '왕산의 제자'라고 하면 알아주었다.
'스승이 없는 이 세상을 무슨 보람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는 박상진을 향해 왜경이 말했다.
"너는 가족이 아니므로 허위의 시신을 인수할 수 없다."
박상진은 문득 '네가 의병이 되려고 왔느냐? 너는 훗날을 대비해 큰 꿈을 꾸어라. 지금은 너의 때가 아니다' 하고 꾸짖으시던 스승의 말씀을 떠올랐다.
'내가 의병에 갔더라면! 가서 스승님을 곁에서 지키고 있었더라면, 오늘 같은 이런 참사는 없었을 것 아닌가. 내가 무슨 큰 꿈을 꾼다고 의병에도 가담하지 않고 지금껏 있었단 말인가.'
그러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박상진이 두 팔로 일본인을 밀치며 소리 질렀다.
"이 놈들아! 스승님을 살려내라! 스승님을 살려내!"
왜경 하나가 박상진의 멱살을 잡고, 다른 자가 뒤에서 달려들어 목을 졸랐다.
"이 놈이 어디서 행패를 부려?"
함께 갔던 양정고보 동기생 김덕기와 오혁태가 이를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순식간에 다들 뒤엉켜 밀고 당기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계급이 좀 더 높은 자가 나타나 혀를 끌끌 차면서 순사들에게 지시했다.
"제자라는 저 자가 허위의 시신을 가져가게 가만 놔두어라. 막상 아무도 가져가지 않으면 어쩔 테냐?"
"그도 그렇습니다만…."
"나는 이토록 조용한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무슨 피해를 입을까 싶어 아무도 허위의 시신을 거두지 않는 게라면 세상 인심도 너무한 것이야! 허위는 조국을 위해 분투한 용사다. 온 백성들이 통곡해도 시원찮을 판에 시신을 수습하러 오는 자가 없단 말인가?"
"조센징들이 그렇습지요, 뭐."
"그래도 혹시, 시신을 못 가져가게 한다고 소요가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면 골치만 더 아파진다. 가져가게 놔둬."
스승의 장례를 마친 뒤 압록강을 건넌 박상진
스승의 시신을 수습한 박상진은 제1회 조선 판사 시험 합격자였다. 손에는 평양법원 발령장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이렇게 순국을 하시는 상황에 내가 판사가 되어본들 일본놈들 앞잡이 노릇이나 할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지!'라고 생각한 박상진은 발령장을 버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일원을 순회하며 지사들을 두루 만난 박상진은 '국내에서 우국 청년들을 독려해 만주 무관학교로 보내 군사력을 기르고, 역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아 항일투사들을 뒷받침해주어야 나라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윽고 1915년 8월 25일, 박상진은 우재룡, 채기중, 김한종, 권영만 등 전국에서 모인 200여 지사들과 함께 대구 달성토성에서 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는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로 발전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광복회는 "민족 역량이 3.1운동으로 계승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1920년대 의열 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 노둣돌이 바로 왕산 허위 의병장이었다.
* 이 글은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참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