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기자말] |
여행에 실패란 없다. 낯설음을 즐기러 떠난 여행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지나치게 당혹할 필요는 없다. 어떤 순간이건 느끼는 만큼이 여행이니까. 이건 오래 전 혼자 배낭 여행 다닐 때 들었던 생각이었다. 내가 발 닿는 데까지 가고 느끼는 것 만큼이 여행이라고. 어떤 목표를 꼭 달성할 필요가 있지는 않다고.
그리고 그렇게 아들에게도 가르치고 싶었다. 그래서 계획했던 일정이 틀어져 우주가 아쉬워할 때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같이 외치자고 했다. '괜찮아, 안 궁금해!' 하지만 여행에서 어떻게 실패가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한다거나 질병에 걸린다면? 실수나 현지의 변동으로 인해 동선과 일정이 망가져버린다면? '정신 승리'를 해보고자 해도 안타까운 건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날은 치명적이진 않지만 돌이킬 순 없는 명백한 실패를 겪은 날이었다.
과학자 꿈꾸는 아이에게 '비행기 조립' 직관이라니, 이런 꿈 같은 일이
한국에서 계획했던 여행의 세부사항들은 보름이 지나면서 바닥이 났다. 애초에 툴루즈는 카르카손에 가기 위해 들렀던 도시라 별다른 계획도 없었다. 계획이 생긴 것은 마드리드에서 만난 오랜 친구 상미와 남편 렉스 덕분이었다. 툴루즈는 상미의 시댁이 있던 도시였던 것이다. 에어버스 항공기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과학도시이기도 했다.
공학도 출신 렉스는 툴루즈에 아이와 간다면 에어로스코피아(프랑스 항공박물관)와 과학 박물관을 갈 것을 권했다. 에어로스코피아 프로그램 중에는 에어버스 항공기 조립을 견학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고 했다. 우주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숨 넘어갈 듯 기뻐했다. 세상의 모든 교통편을 사랑하는 초등 1학년 소년에게 비행기를 조립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꿈같은 일이었다.
결국 나는 마드리드에서 새벽까지 에어로스코피아 홈페이지와 프로그램 일정을 찾아가며 날짜를 맞춰 항공기 조립 견학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성취감이 몰려왔다. 이 코스는 대외비라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고 해서 인터넷에서 사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너무나 좋고 대단했다'는 후기만 있을 뿐이었다. 별 관심이 없던 나도 제법 궁금해졌다.
당일 날 아침, 둘 다 기대에 들떠 일찌감치 일어났다. 슬슬 피로가 누적돼서 이른 기상이 둘 다에게 쉽진 않았지만 그 날은 특별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침밥을 숙소 식당에서 열심히 먹였다. 키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이를 먹이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입에 낯선 외국 음식인 데다 졸리기까지 한 아침이다. 먹이다 보면 복장이 터진다. 매일 아침 아이 엄마의 인내를 되새기게 된다. 그래도 여유 있게 일어난 터라 충분히 시간을 들여 먹이고 일어났다.
에어로스코피아는 대중교통으로는 가기가 어려워 우버를 타야 했다. 그런데 가다보니 우리가 탄 우버에는 카드 결제기가 없었다. 나름 예산 관리를 하기 위해서 난 우버에 결제 카드를 등록해 놓지 않은 상태였다. 현금을 내놓고자 하니, 내게는 200유로였는지 500유로였는지 30만 원이 넘는 큰 지폐 한 두 장만 있었다.
니스에서 지갑을 도둑맞으면서 앞서 써오던 현금과 주로 쓰던 카드를 도둑맞은 후여서, 캐리어에 남아있던 카드와 현금을 일부만 챙겨온 터였다. 우버 기사는 돈을 바꾸라며 근처 빵집에 내려주었다. 그러나 그 빵집엔 거스름돈이 없었다.
우버 기사는 다른 마켓에 내려주었다. 그곳에도 거스름돈은 없다고 했다. 엉뚱한 데서 시간이 크게 지체되고 있었다. 우주는 불안해 하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초조감이 너무 커져서, 우버 비용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세 번째 빵집에서 먹을 것을 많이 사고 거스름돈을 받아 우버 비용을 간신히 맞춰서 다시 출발했던 기억이다.
우주를 안심시키며 에어로스코피아에 도착하니 4분가량이 지나 있었다. 다행이다. 아직 시작 안 했을 거야. 했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어. 에어로스코피아는 거대한 아스팔트 광장과 큰 건물 몇 동이 있는 형태였다. 잠시 두리번 거리다 메인 건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비행기 조립하는 곳까지 연결될 것 같지는 않은 건물이었다. 나는 매표구에서 예약 화면을 보여주며 어떻게 따라잡아야 되는지를 물었다. 5분 정도 늦은 상태였다. 사감 선생처럼 냉정하게 보이는 중년 여성분이 안경을 치켜 올리며 예약 화면을 보곤 말했다. 비행기 조립 견학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을 위한 버스는 방금 출발했다고. 당신들은 볼 수 없다고.
그 직원이 너무나 단호하고 차가워서, 판타지 영화의 기숙사 사감 선생님의 클리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우주 역시, 불안한 기운을 감지했다. '왜요, 아빠 왜요? 뭐래요? 뭐라는 거예요?'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나는 우주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늦었대. 여기서 단체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이미 출발해서 우리는 볼 수 없대.
'너 때문이야'... 나를 탓하는 마음 속 소리
당시 일그러지는 우주의 얼굴이 내겐 지금도 느린 화면처럼 기억이 난다. 우주는 이번 여행 전체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서럽고 가장 큰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의 꿈은 유치원 때부터 과학자였다. 기차나 지하철은 더 어릴 때부터 집착적으로 사랑해온 대상이었다. 비행기를 타게 된 직후부터는 비행기와 공항이 새로운 대상이 되었다. 비행기 조립 견학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커, 나도 기분이 좋아 맞장구를 치며 그 기대를 증폭시켜 주곤 했었다. 엄청 신기하겠지? 너무 재밌겠지?
나는 아이를 달래다 다급히 직원에게 매달렸다. 지금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나? 단지 5분 늦었을 뿐인데. 여기 다른 수단이 없으면 택시를 타거나, 아니면 걸어서라도 따라잡을 수는 없겠나.
직원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주는 하늘이 무너지는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왜 아침 식사 때 꾸물거렸을까. 왜 더 일찍 출발하지 않았을까. 왜 우버에 카드를 등록해놓지 않았을까. 왜 미리 잔돈을 만들어놓지 않았을까.
그 짧은 와중에 나에 대한 자책이 휘몰아쳤다. '혼자 하는 여행도 아닌데, 아빠가 돼놔서 이렇게 불안하게 주먹구구처럼 다닐 거야? 만날 아슬아슬하게 다니는 버릇하더니 애 아빠가 돼서 이런 꼴이나 겪는구나. 꼴 좋다. 넌 그렇다 쳐. 네 아들은 어쩔거야.'
직원은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대신 에어로스코피아의 비행기 뮤지엄 전시를 들어가서 보라고. 애들은 그것도 좋아할 거라고. 여기 들어가게 해줄 테니 빨리 애를 달래라고. 이 건물의 용도가 비행기 뮤지엄이었다. 원래 조립 견학이 끝나면 이 전시까지 보여줄 요량이었다.
"우주야, 비행기 조립은 볼 수가 없대. 하지만 대신 옛날 비행기들 전시는 볼 수 있어. 아빠가 미안해. 그만 울고 전시 보러 가자."
우주는 어찌어찌 울음을 그쳤다. 어쩌겠는가. 혼이 빠져나간 두 부자가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비행기 전시실로 들어갔다. 에어버스가 제작해온 콩코드 여객기를 비롯해 여러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었고 일부는 실내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애초에 비행기에 큰 흥미가 없는 내겐 엄청 대단해보이는 전시는 아니었다. 그래도 우주는 신기했는지, 나름의 흥을 찾아 이 비행기 저 비행기를 둘러보며 다니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였다. 아까 순간적으로 몰려온 패배감이 좀체 씻기지를 않았다. 비행기 조립 코스를 발견하고 예약했을 때, 난 이날이 우주에게 평생을 갈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과학자가 꿈인 아이에게 현대 산업 공학이 피워낸 꽃과도 같은, 현대의 비행기 조립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나 또한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중에 정말로 우주가 공학도가 된다면 이날의 광경을 떠올리게 될 것 같았다.
소년의 눈에 담긴 경이로운 기계들이 원형적 동기부여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다 망쳐버렸다. 더욱이, 평생 동안 이 곳에 다시 올 일이 있겠는가. 만에 하나 있다해도 먼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경험은 영원히 아이로부터 사라져버린 경험이 될 것이다. 나 때문에. 나의 시간 관리와 엉성한 여행 수행 때문에!
우주가 전시를 즐겁게 관람한 것은 진짜 마음이 풀어져서였을까, 아니면 아빠인 내가 울적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아는 우주는 비행기 조립을 못 보는 좌절감을 그렇게 빨리 극복할 수 있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주는 이 비행기 전시를 꽤 흥미롭고 신나게 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 감정을 읽은 것이 아닐까. 자기 이상으로 아빠가 좌절감을 보이고 있는 데에 대한 우주 나름의 최선을 보였던 것이 아닐까. 나는 비행기 사이를 뛰어다니는 우주로부터 그나마 작은 위로를 받고 있었다.
에어로스코피아와 과학박물관까지, 그날의 일정을 끝내고 대중교통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날 나는 그 이후로도 티는 안 냈지만(안 냈다고 생각하지만) 하루 종일 우울감을 벗지 못했다. 지갑털이를 당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우주는 이미 극복했는데, 아빠가 왜 이 모양인지. 생각에 빠져있는 내게 우주가 물었다.
"아빠, 우리 xxx역에서 내리는 것 맞죠?"
"응."
"정말 맞죠?'
"그래."
"아빠."'
"왜?"
"그럼 우리 방금 내렸어야 했어요."
뭐라고? 벌써? 에이 아니야, 하면서 급히 노선도와 전광판을 찾아 두리번 거리며 구글맵을 두드렸다. 우주가 맞았다. 우주는 이제 길 찾기에 대해서는 아빠보다 자신이 유능하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가망 없는 길치에게서 이런 아들이 나왔을까.
한 정거장을 지나쳐 내렸다. 하지만 그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 우리는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해는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조차 제대로 안내하지 못한 무능력한 아빠라는 생각에 마음이 허탈했다. 그런데 상점도 몇 개 없는 길가에 큰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한 정거장 더 갔기에 만날 수 있었던 곳
보드게임 전문 숍이었다. 태어나서 본 보드게임 전문 숍 중에 가장 컸다. 우주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가게로 달려 들어가 수많은 보드게임을 구경했다. 그리곤 우주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의 확장판을 발견해 사들고 나왔다. '티켓 투 라이드'라는 철도 게임의 프랑스 버전 확장판이었다. 보드게임 상자를 가슴 가득 끌어안고 걸어가며 얘기했다.
"지하철 역을 지나친 덕에 보드게임 가게를 발견했네?"
"그러게요!"
"안 좋은 일이 생긴 덕에 좋은 일이 생겼다 그지?"
"맞아요!"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 위에서 보드게임을 펼치고 놀았다. 그날은 내게는 어이없는 실패였지만 우주에게는 실패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