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암에 머무르다
수운 선생은 1861년 12월 그믐께 서형칠 등 제자들의 안내로 교룡산 선국사(善國寺)의 덕밀암(德密庵)으로 거처를 옮겼다. 덕밀암은 선국사에서 산속으로 약간 떨어진 암자이다. 수운은 이곳에서 약 5개월 머물면서 '자신이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는 뜻으로 암자의 이름을 은적암(隱跡庵)이라 지어 불렀다. 선생은 은적암에서 <동학론(논학문)>을 집필하여 동학(東學)의 진의를 설파하였다.
은적암은 현재 남원시의 북쪽 산곡동 교룡산에 위치한다. 교룡산성은 본래 백제 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의 성은 조선 시대에 축성한 것이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에도 내부에 부속시설로 군창과 우물이 있다. 산중턱에는 성벽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으며 동쪽에는 수구(水口)가 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는 선생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원의 마을 형세와 산수의 아름다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운 것을 두루 구경한 후 경치가 뛰어난 땅임을 알았고, 시를 짓는 사람과 정의롭고 의로운 사람이 많음을 알았다. 나그네 차림으로 마을과 마을에 찾아들고 고을과 고을을 두루 보고 다니다 은적암에 이르니, 때는 섣달그믐이라. 해는 저물고 절의 종소리는 때맞추어 들려오고, 스님들이 모여 법경을 외우며 소원을 축원하고 새벽 불공을 드린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니 고향 생각에 외로운 등잔불 아래서 한밤을 지냈다.
운명, 수운께서 만약 전라도에 오지 않았다면 갑오년의 혁명은 어찌 되었을까.
일본의 침략에 수만의 죽음은 과연 없었을까.
기미년 독립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러한 처절한 피 흘린 희생이 없었다면 민족사가 너무 쓸쓸하지 않겠는가.
어찌 선열님들께 머리 숙이지 않겠는가.
동학을 반포하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1860년 8월경에 북경을 침략하자 중국의 황제는 열하로 피난하였다. 이후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위기 의식이 높아져 갔다. 조선 역시 서양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배층과 양반 가족들은 자신들만의 살 길을 찾아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떠나고 흔적들을 감추었다.
수운 선생은 은적암에서 겨울을 지내며 <동학론(東學論)>을 쓴다. 경주 용담에서 경상도일대 유생들과 관아로부터 서학(西學)이라는 모함과 지목을 받았고, 일부 백성들도 잘못 알려진 소문을 근거로 동학을 서학과 닮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최씨 문중에서조차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곤욕스러운 형국이었다.
수운 선생은 이러한 오해와 모함을 불식하고자 동학론(논학문)에서 제자들과의 문답 형식을 빌려 논리적인 글을 발표하였다. 남원 은적암에서 동학을 반포한 그 내용을 요약하고 한마디로 단언하면 도수천도(道雖天道)·학즉동학(學則東學)이다. 다시 말씀드려 '도(道)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 즉 동학(東學)이라'는 선언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무극대도(無極大道), 천도(天道)라는 명칭보다는 동학(東學)이라 이름 하였다.
수운 선생은 남원 인근의 민심과 풍속을 살피면서 전주에 이르기까지 동학을 전파했다. <천도교전주종리원 연혁>에는 1861년 (포덕 2년, 신유-당시의 시기와 상황을 살펴보면 1862년 1월 초쯤으로 추정됨) 제자 최중희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전주에 오시어 포덕하였다고 하였다. 당시는 혹한의 겨울로 남원에서 전주까지 가서 많은 사람에게 동학을 전했다는 사실에서 포덕에 관한 강한 의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황현(1855~1910, 조선말의 순국지사)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오하기문>에 "최제우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주문과 부적을 전하였다. 그 학은 천주(天主_한울님)를 받들고 있는데 서학과 구별하기 위해 동학이라 이름하여 불렀다. 그는 지례(知禮)와 금산(金山), 호남의 진산(珍山)과 금산(錦山)의 산골짜기로 다니면서 선량한 백성을 속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계를 받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수운 선생은 남원 은적암에서 은둔하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전집필과 더불어 전주 이외에도 호남의 여러 지역에서 적극적인 포덕 활동을 전개하였다. 수운 선생이 전주에 포덕한 지 30여 년 후인 1894년에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성과라 평가받는 전주성 점령으로 동학 농민군은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었고, 전라도 일대에 민주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갑오년(1894) 9월 초 전주 삼례에서 재집결한 동학 의병은 일본군과 맞서는 항일 전쟁의 서막을 열게 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검가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가로, 검무는 훈련으로 행해졌다고 한다. 그 검가 즉 검결(劍訣)을 사료에 근거하여 설명해 본다. 먼저 검결은 검가와 같은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검결·검가는 우리말로 통칭 '칼 노래'이다.
검결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중심으로 동학 초기 기록에 1861년 4월경에 지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수운 선생이 1862년 2월경 남원 은적암에서 지었다는 검가가 검결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정확히 구분하는 기록이 없다.
1883년에 해월 최시형 선생이 <용담유사>를 간행할 때 검결, 검가를 경전에 넣지 않았다. 용담유사에서 검결, 검가를 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수운 선생이 관으로부터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1864년 3월 10일(음) 순도(殉道)를 당했을 때 적용된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중심 내용에 '국정을 모반하여 반란을 획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검결 즉, 칼 노래를 지목했었다.
또한 해월 선생은 수운 선생의 7주기 순도(순교)일인 1871년 3월 10일에 일어났던 영해 교조 신원 운동인 '이필제의 난'에서 교단 차원의 엄청난 희생과 피해를 몸소 겪었다. 그 때 검가가 얼마나 위력적이며 도전적인 '칼 노래'인지 알았던 것이다. 동학 교단 최고 책임자로서 칼 노래와 칼춤이 해월 선생으로서는 정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검결과 검가에 대해 사료들을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여러 개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으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생각이다. 경상 감사 서헌순이 정부에 올린 장계에 의하면, "수운 선생의 아들 세정(世貞_동몽 최인득)이 미친 듯이 홀로 나무칼을 쥐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데 그 노래인 즉 '시호시호'의 곡이었다"고 하였다.
수운 선생과 함께 대구 감영에서 재차 심문을 받던 이내겸의 진술에 '검가'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지금까지 여러 사료에 나타난 검가 즉 검결의 내용은 세 가지가 중심을 이루고, 필자가 찾아낸 두 가지를 합하여 대략 다섯 가지로 전해오고 있다. 그중에서 다음 검결의 내용이 현재 공식적인 검가로 인정받고 있다.
검결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 넓은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데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칼노래(한글화)
때로다, 때가 왔도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 좋은 때가 왔도다.
만세에 한 번 태어날 대장부로서 오만 년에 만나는 좋은 때로다.
용천검 잘 드는 칼을 아니 쓰고 이때가 지나면 무엇을 하겠는가.
긴소매가 달린 춤옷을 멋지게 걸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짓 들어,
넓고 커다란 이 우주에 한 몸으로 비켜서서는 칼노래 한 곡조를,
"때가 왔다, 때가 왔도다."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해와 달을
희롱하고, 느리게 펄렁이는 긴 소매의 춤옷은 우주에 덮여 있네.
예부터 이름난 장수 어디에 있나, 이 대장부 앞에 당해낼 장사가
없도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내 몸과 목숨이 길이길이 좋을시고.
지금까지 전해오는 검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수운 선생이 자신의 득도에 대한 기쁨과 도력에 대한 경지를 표현했으며, 또한 한울의 지극한 기운인 영기(靈氣)와 자신의 기운을 일체화시키는 건강 수행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천제(天祭) 의식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검가, 검무는 수운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식과 질병을 물리치는 치병 등 심신 단련에 그치지 않고, 보국안민, 광제창생, 척양척왜의 큰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을 물리치려고 기포한 동학 의병들의 칼노래와 칼춤은 죽음도 불사하는 동학군의 백절 불굴의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 계속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