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접주를 최초로 정하다
수운 선생이 관으로부터 풀려난 후, 1862년 11월 초쯤 해월 선생이 수운 선생을 찾아와 자신이 사는 검등골(검곡) 집에 오시기를 청하였다. 수운 선생은 검등골이 깊은 산중으로 몸을 숨기기는 좋으나 왕래하기가 불편하여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한다.
수운 선생은 거처할 장소를 흥해 매곡동 손봉조(孫鳳祚)의 집에 정하였다. 매곡동은 교통이 편리하였고, 큰어머니 오천 정씨(근암 최옥의 첫째 부인)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수운 선생이 매곡동에 머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처의 동학도인들이 찾아온다. 보은, 남원, 고성 등 먼 곳에서도 매곡동으로 몰려왔다. 수운 선생은 12월 그믐에 각처의 지도급 도인들을 손봉조의 집에 모이게 하고 그중에서 접주를 친히 정하였다. 그 후 매년 말 납일(臘日_신神에게 제사 지내는 날)에 접주 임명이 공식화되었다.
동학 최초의 접주(接主) 명단은 다음과 같다.
「경주부서(府西) 백사길 강원보, 영해 박하선, 대구·청도·기내 김주서, 청하 이민순, 영일 김이서, 안동 이무중, 단양 민사엽, 영양 황재민, 영천 김선달, 신령 하치욱, 고성 성한서, 울산 서군효, 경주부내(府內) 이내겸, 장기 최중희」
이 명단으로 미뤄 보면 동학이 창도 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일부와 전라도까지 그 세력이 퍼졌고, 특히 경주 이북 지역이 동학의 중요 활동지역임을 알 수 있다. 위 접주 명단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나오는 것으로 남원, 전주, 금산 등 전라도 지역에 포덕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인데, 이 지역의 접주 명단에 없는 것은 <도원기서>에서 착오로 빠진 것으로 보인다.
접주를 임명한 수운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계해년(1863)을 앞두고 1862년 12월 결(訣)이란 시 한 수를 지었다. 결(訣)은 "때는 그때가 있으니 한한들 무엇하리, 새 아침에 운을 불러 좋은 바람 기다리라"의 이별과 비결 두 뜻을 내포하고 있는 글이다.
수운 선생은 새해를 맞아 마룡동 용담집에 잠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매곡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손봉조의 집에 오래 머무르기가 부담스러워 2월 초에 영천 이필선(李弼善)의 집으로 간다. 영천에서도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찾아오는 많은 제자에게 동학을 설법하였다.
3월 초에는 다시 신령의 하처일(河處一)의 집으로 가서 잠시 머문다. 관의 지목을 받아 제자들에게 신세를 지며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이었다. 수운 선생은 신령에서 여러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용담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굳힌다. 이제 수운 선생은 관의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3월 9일(양4.26) 용담의 본가로 돌아간다.
왕희지의 필적과 같아지고
다시 용담으로 돌아온 수운 선생은 둘째 아들 세청(世淸)과 아들 친구인 김춘발, 성일규, 하한룡, 강규 등에 글과 글씨를 가르쳤다. 당시 상황을 <도원기서>에서는
"3월 하순쯤 둘째 아들 세청과 더불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소일하다가, 비로소 필법에 조화가 이루어져 액자(額子)를 쓰기도 하고 진체(眞體)를 쓰기도 하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필적이 중국고금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와 같아졌다. 사방의 도인들이 필법의 신기함을 듣고 날마다 문에 가득 몰려들었다"고 하였다.
수운 선생은 제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칠 때 글쓰기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비결의 방법을 알려주면서 "닦아서 필법을 이루니 그 이치가 한 마음에 있도다"로 시작되는 필법(筆法)이란 시를 남겼다.
필법은 단순히 붓글씨 쓰는 방법만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동학과 천도의 근본이치는 물론 수양에 관한 방법도 들어있다.
사생결단으로 물러서지 않기로
수운 선생이 용담으로 돌아오신 지 한 달여가 지나고 4월이 되자, 각처의 동학 도인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이 무렵에 신미(1871)년 영해교조신원 운동(이필제의 난)을 주도한 이필제가 입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영덕에 사는 강수(姜洙)가 수운 선생에게 동학의 수련하는 즉 도(道) 닦는 절차를 물으니, "다만, 성경신(誠敬信) 석 자에 있다"고 하면서 특별히 좌잠(座箴_수도하는 사람의 지침서)을 써 주었다.
이제 관에서는 교조인 수운 선생이 아닌, 일반 동학 도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당시 여러 곳에서 동학 도인들이 모여 산중에 움막을 치고 집단수련을 하였다. 수운 선생은 더욱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고 사는 것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사생결단에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로 하였다.
수운 선생은 더 적극적인 포덕으로 동학의 탄압에 대처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5월 하순, 개접(開接)한다는 통문을 각지에 보냈다. '개접'이란 접 모임을 열어 강습하고, 집단으로 모여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접별로 40~50여 명씩 모아 7일 정도의 기간에 집중적으로 강론하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개접을 통해 접 소속 도인들의 의견을 청취 하고 토론을 거쳐 관의 탄압에 공동대응하기도 했을 것이다. 6월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개접을 하였다. 바로 목숨을 건 개접이었다.
수운 선생은 강수 등 제자들에게 액자 한 장씩을 써주었다. 또 강론에 자주 참여하는 도인들을 골라 글을 써서 나눠주면서 독려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탐지한 관에서 7월 초부터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다. 동학의 활동과 교세가 늘어나자 유생과 관에서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한다. 탄압의 명분은 이단으로 모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서학으로 모함하는 것이었다. 본격 동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수운 선생은 본인의 위험은 물론 도인들의 큰 피해가 예상됨으로 강론을 일단 멈추기로 하고, 7월 23일에 파접(罷接)하기로 했다. 파접은 열었던 접을 파하여 닫았다는 뜻으로, 동학의 모임을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과 제자들
무엇이 두려우랴
목숨을 걸고 접을 열어
경전을 공부하고
수련을 통해
사람으로서의
최고 경지를 돌파한다.
'사람은 원래 시천주이다'
'사람은 원래 하늘이었다'」
성공자는 가는 법이다
수운 선생은 일련의 동학에 대한 탄압을 심각하게 판단했다. 자신은 물론 동학의 앞날에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을 예상하면서, 7월 23일 파접하는 날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경상에게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리고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한다.
"진실로 성공자(成功者)는 가는 것이다. 이 운수를 생각하니 필시 그대 때문에 생겨났다. 이제부터 도중(道中)의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여 나의 가르침을 어김없이 하라."
"어찌하여 이런 훈계 말씀을 하십니까?"
"이는 곧 운이니라. 난들 운이니 어찌하랴. 그대는 마땅히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저에게 과분합니다.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일은 즉 그렇게 되었다. 걱정하지 말고 의심하지 마라."
수운 선생은 '성공자는 가는 것이다'라며 자신의 의무는 다했으니 물러난다는 의미로 해월 선생에게 말한다. 곧 자신에게 닥칠 죽음의 운명을 예측하면서 하신 말씀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자기 뜻도 있지만, 하늘의 운수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편, '북도중주인'이라는 직책은 경주 북쪽 지역의 도중을 뜻한다. 해월 선생이 관장하는 곳은 '검곡 일대의 경주북산중, 영일, 청하, 영덕, 영해, 평해, 울진, 진보, 안동, 영양, 단양, 신녕, 예천, 상주, 보은' 등이다.
이때 수운 선생은 "최경상을 북도중주인으로 정하였으니 용담에 내왕하는 도인들은 먼저 검곡을 거쳐서 오라"고 지시한다. 또한, 해월 선생에게 "우리 도의 운수는 북방에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그런 대도의 중책을 해월에게 암시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때부터 해월은 '북접대도주'란 별칭이 평생을 따라 다닌다.
수운 선생은 7월 23일 파접 이후 <도덕가>를 지어 반포하였다. 수운 선생은 <도덕가>에서, "우습다 저 사람은 지벌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 하여, 당시 신분과 학문이 높다고 뽐내는 사람들에 대해 경계하면서 타락한 사회를 비판하였다.
또한, 동학을 중상모략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올바르게 수도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하였다.
이때 칠언절구(七言絶句) 시 한 수도 지었다.
龍潭水流四海源
용담수류사해원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龜岳春回一世花
구악춘회일세화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한 것은, 다시 개벽 즉 후천개벽이 시작된 곳이 바로 용담이므로, 무극대도인 천도, 동학이 물처럼 흘러 온 세상에 퍼져 언젠가는 포덕천하(布德天下)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 말씀이다.
수운 선생이 득도한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한 것은, 모진 탄압을 이겨내고 진리의 꽃을 피워 온 세상이 동학의 세상으로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이다.
즉, 수운 선생은 동학을 자연에 비유하여 좋은 세상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때 동학은
지벌과 문필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사람 자체가
하늘인데 무슨
지벌과 문필이단 말인가.
요즘 세상이야
돈이면 못할 것이 없으며
학벌이 하늘 위에 앉아있다.
그래서 다시 동학이다.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