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봉집 옥상에서 고은설씨 가족.
송재한
서울에서 빈손으로 내려온 자식을 보고 부모님은 무척 상심하셨다. 그후 고은설 대표는 엉뚱하게도 연극판에 뛰어들었고, 그 다음에는 결혼과 출산이 이어졌다. 낙향길에 동참했던 남자가 그의 남편이 되었다. 둘째까지 낳고 나니 3년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야망있는 여자, 대체 불가능한 삶을 꿈꾸던 고은설은 산후우울증 직전의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다.
"그 때는 정말 집을 뛰쳐나오는 심정이었어요. 더 이상은 그렇게 못 살겠더라고요."
아이 둘을 옆에 끼고 고은설은 전주 노송동을 헤집고 다녔다. 사라져가는 동네와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다. 망가지는 걸 찍어야지, 기록해야지, 이 심정이었다. 한옥마을로 대표되는 전주는 소위 조선시대로 대표되는 문화는 잘 보존되지만, 근현대의 건물이나 유산 보존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편이다. 고 대표는 70, 80년대에 지어진 양옥집, 소위 '구옥'에 빠진 사람이다.
"제가 그런 집을 보면 흥분을 해요. 빈집을 보면 뭔가 마음이 쓰이고 저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냅두질 않아요. 병인가, 이런 생각도 했어요. 옷이나 화장 이런 거는 관심없는데 이상하게 집이나 공간에는 왜 이렇게 욕심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것들이 잘 지켜줬으면 좋겠고, 기획적인 걸 가미해서 더 빛났으면 좋겠다, 그걸 내가 하고 싶다, 그런 욕심인 거죠."
그 욕심 덕분에 고 대표는 몸이 힘들다. 인봉집은 셋째 낳고 일년도 안 됐을 때 작업해서 정말 몸이 녹을 뻔했단다. 왜 일을 벌여, 이렇게 생각하며 이불킥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노송동 골목에서 이름모를 집을 만나게 되면 다시 초기화돼 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유년 시절 아버지와의 기억, 서울에서 경험한 고시원 생활이 영향을 미쳤다.
"인봉집에 사람이 들면 집에 불이 들어오잖아요. 그럼 다음 날 동네 어머님이 그러세요. 손님 왔어요? 아이고 잘했어. 거기 사람 든 걸 보면 기분이 좋아. 그런 말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죠."
이제 전주에 온 지는 십 년, 노송동에 산 지는 6년이 됐다. 그동안 돈과는 인연이 없었다는 고은설 대표. 돈 없이 가니까 좋은 사람들만 꼬였다며 자족한다. 이제 고은설 대표는 협동조합을 만들어 노송동에서 뭔가를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은설은 저지르고 볼 것이다. 노송동에 사니까. 동네가 살아있는 노송동이 있으니까.
"집 고칠 때도 주민분들이 그냥 와주셨어요. 철거하고 할 때도 도와주시고. 그런 분들에게 빚진 거죠. 동네 주민들, 청년들. 난로도 빌려주시고, 그릇도 다 갖다 주시고. 집에 필요한 물건들이 그렇게 채워지더라고요. 사람들의 힘으로, 동네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