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이틀 쉬는 나라에서 살아본 소감

<김현종의 영국이야기 7>

등록 2000.12.11 15:15수정 2001.01.1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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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 와서 살다보면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차이점을 찾게 된다. 예컨대 간판이 그렇다. 한국에서 나는 수많은 간판과 현수막을 보았다. 주말에 교외로 나가 보면 우리는 파크와 가든과 까페의 서부 개척시대로 나온 느낌을 갖게 된다. 간판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안 먹고, 안 마시고, 안 자면 낙오자"라고.

시내로 들어올 때쯤부터는 구호성의 현수막들이 곳곳에서 우리를 가르친다. 지금이 교통질서 집중 계도기간인 것도, 건전한 소비생활이 가정경제를 지키는 비결이라는 것도, 심지어 '어린이는 나라의 장래'이니 보호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것도 현수막을 통해 알게 된다. 가장 눈물겨운 노력은 유원지 입구에 있는 산화 경방기간 안내문이다. 집에서는 "불조심하자"고 하는 분이 굳이 밖에 나와 현수막을 만들 때에는 산화(山火)를 경방(警防)하자고 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요즘은 가슴 섬뜩한 멸공, 승공, 때려잡자는 구호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아주 가끔, 깊숙한 시골에 가면 새마을 회관의 미색 벽에 울긋불긋 페인트 글씨를 볼 수 있지만. 영국에 와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현수막을 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내 기억으로는 런던에서도, 옥스퍼드에서도 보지 못했다. 경치가 좋은 곳에 가도 아예 파크나 가든 같은 '편의시설' 자체를 보기 어렵다.

마가렛은 50대의 중년 부인인데 학교에서 지정해준 나의 영어 가정교사다. 마가렛에게 "왜 영국은 경치 좋은 곳에도 대형 음식점이나 여관을 보기 힘드냐"고 물었더니 자치단체가 그런 업소를 허가해줄 엄두를 못 낸다는 게 그녀의 답이었다. 주민들이 먼저 들고일어날 것이고, 장사도 잘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영국에도 시골이나 명승지에는 재워주고 아침 밥 주는 B&B(Bed and Breakfast)가 있다. 그렇지만 그 간판은 가로세로 1미터 정도의 나무판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을 '영국은 옳고 한국은 그르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한다. 간판과 현수막이 즐비한 현실은 우리 정신세계와 소비풍토라는 현실의 또 다른 반영에 불과하다.

다만 거리가, 길이 덜 시끄러워서 좋은 점은 확실히 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각적으로 자꾸 외치고 자극해오는 존재가 많은 것보다는 그런 게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서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살다보니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제도와 관습들이다. 휴일 제도는 그 중에서도 관심이 많이 가는 부분이다.

알다시피 영국은 일주일에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쉰다. 금요일 오후 4시쯤 되면 퇴근 차량들로 길이 막힌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이틀을 쉬니 휴일이 너무 길었다. 토요일 오전은 늦잠 자고 오후에는 한글 책을 봤다. 문제는 그 다음날도 일요일이라는 점이다. 할 일이 없어 동네 책방에도 가고 텔레비전도 보고, 그래도 한 나절이 남았다.

나는 아마 한국 사람 중에서도 휴일을 잘 찾아먹지 못한 축에 속하리라. 기자생활 할 때에는 대체로 일주일에 반나절을 쉬었다. 신문이 매일 발행되던 시절 기자들은 2부 교대로 돌아가며 격주로 일요일을 쉬었다. 그나마도 사건이나 중요 뉴스가 발생하면 휴일은 없는 셈쳐야 했다.

97년말의 외환 위기 이후 광고난을 이유로 일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게 되자 기자들은 이제 일주일에 하루나 하루 반을 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덕은 보지 못했다. 그 즈음 신문사를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도대체 그 이틀을 어떻게 쓸까. 일단 가족간에 대화가 많다. 돈 타고 밥 먹을 때만 가족간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 마가렛의 경우 남편과 음악 이야기, 정치나 외국 이야기, 책이나 그림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했다. 남녀간에 그런 주제를 나누는 것은 연애적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평생을 연애하듯 산단 말인가.

하기야 수시로 키스하고 껴안는 게 영국의 부부들이니까. 어쨌든 보통의 영국 사람은 보통의 한국 사람보다 대화에 강하다. 이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로 나는 흉내내기를 꼽는다. 노래부르는 실력은 70%쯤이 음치에 가깝지만 남의 말투나 동작 흉내내는 것은 프로급이다. 선천적이라기 보다는 풍부한 대화 경험에서 생긴 후천적 능력으로 해석한다.

마크는 나와 동갑인 전직 영국 국가대표 크리켓 선수다. 그의 주말은 세차가 가장 큰 일이다. 일요일 아침 2시간쯤에 걸쳐 차를 닦는다고 했다. 대개의 영국 사람이 그렇듯이 이 집은 남편과 아내가 교대로 본인들과 아이들을 출퇴근, 등하교 시키는 게 큰 일이다. 당연히 깨끗한 차량 유지는 가족간의 주 화제다.

운전은 부부가 함께 하지만 세차는 남편의 몫이다. 그래서 웬만한 영국 남자는 자동차 엔진오일 교환 정도는 집에서 직접 할 줄 안다. 세차장은 당연히 찾기 힘들다. 대화에 이어 집안 일을 보는 것도 주말의 주요 일과라는 얘기이리라. 텔레비전 시청과 정원 가꾸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고향 팀이 숙적 팀과 축구 경기라도 갖는 날은 온 시내가 이로 인해 시끄럽다. 퍼브에서는 대형 텔레비전 앞에 사람들이 수십명씩 모여서 스트레스를 푼다. 축구는 남자들끼리 어울릴 때 가장 중심이 되는 화제다. 축구 시합 결과는 주초의 직장에서 우리나라 주말 연속극 같은 효능을 갖고 있다.

정원 가꾸기도 영국적인 특징 중의 하나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가난을 강조할 때 "나는 한뼘의 정원도 없다"고 말한다. 집이 없거나 차가 없는 것보다 정원이 없는 게 더 가난의 상징인 나라다.

책에서 이 부분을 읽고 주변의 영국 사람 세 명에게 물어보니 정말이라고 했다. 꽃을 가꾸는데 아이 키우는 만큼 공을 들인다. 그리고도 손재주가 없어서인지 내 눈에는 그저 그렇다. 영국 사람은 확실히 손재주가 부족하다. 영국 사람이 요리 잘한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은 없으리라.

나는 영국 사람들이 시쳇말로 '쫀쫀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이틀만 쉬면 2박3일로 짐 꾸려서 산이나 바다, 호텔, 콘도미니엄으로 가서 밤새 고기 구워먹으며 화투를 돌려야 직성이 풀리는 국민과는 다르다. 맨날 집에 틀어박혀 책이나 보고, 얘기나 하고 있으니. 그래서인지 토요일자와 일요일자 영국 신문은 한가마니다. 더 타임즈의 경우 평일 신문 값이 35페니인데 토요일은 1파운드, 일요일은 1파운드 15페니이다. 이런 날은 부록까지 합쳐 하루치 신문이 3백 쪽 이상이다. 몇 번을 큰맘먹고 시도해봤지만 토, 일요일자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날이 없다.

영국의 가장들이 가족을 호기롭게 데리고 놀러 가거나 외식을 즐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추측으로는 문화나 풍습도 주요한 몫을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빤한것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은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생기는 돈이 좀 있다. 보편적으로 한국의 사회인들은 겉 수입과 속 수입이 다르다. 회사들도 이를 미덕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회사들은 일반적으로 연월차 수당이나 근속 수당 같은 것을 월급 통장 이외에 따로 직접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도 소액이지만 차비나 활동비를 현금으로 주는 게 관습이다.

가장들은, 또는 사회인들은 그런 돈 가지고 집에서 '체면'을 세울 수 있다. 여기는 그런 제도가 없다. 업무상 택시를 타면 영수증 끊어서 제출해야 한다. 나는 다짜고짜 투명한 사회로 가자고 말하지 않겠다. 그건 오늘 이야기와는 또 다른 커다란 주제다. 다만 주 이틀 휴일제는 여러 가지 점에서 한번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한국에서도 정부 부처와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차차 추진한다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했으면 싶다.

내 경험으로는 일주일에 이틀을 온전히 쉴 수 있으면 보다 많은 사람의 의식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한다. 처음에는 고속도로와 유원지가 붐비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뭔가를 도모하는 쪽으로 바뀔 것이다. 별도로 주제를 잡아 공부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독특한 취미를 만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장사'에 강하다. 시간과 기회를 잘 활용하는 국민이라는 게 평소 생각이다.

이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키워나가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그 점에 있어 사회적 여건이 부족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노동의 절대시간도 많지만 모두들 비슷한 관심사 속에서 비슷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세대적 동질감이 강한 30,40대가 그래 보인다. 혼자만의 길을 가는 사람, 혼자만의 세계를 갖는 사람은 은연중 왕따 당하는 게 아직까지의 현실이다.

기업들도 요즘 같은 경제 위기에서는 무조건 자리에 붙어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기업은 선호하지 않을지 몰라도 중간 관리자들은 얼마나 자리에 붙어 있느냐를 업무에 대한 성실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우가 망할 무렵 옆집에 사는 대우가족 아빠는 매일 밤11시30분까지 회사에서 일하다가 왔다. 회사 앞에서 저녁 먹고 들어와 어떤 날은 멀거니 텔레비전이나 보았다고 한다. 회사는 회사대로 야근수당은 못 줘도 식대는 지출했다. 노동력의 소진과 회사 돈의 가외 지출이라는 이중의 낭비였다. "회사가 위기이니 다시 뛰어야 한다"며 중역진들이 밤늦게까지 '일하는' 모범을 보이자 아랫사람들은 그보다 30분 더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산성이 올랐던가. 대우가 부도를 면했던가. 아니다. 무능한 중역들의 옛날 식 자리보전 작전에 직원들만 녹아났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 구조조정과 실직의 한계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주 이틀 휴무라니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우선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계의 찬성 이유 중 하나가 주 이틀 휴무제가 가져올 고용의 신규 창출 효과라고 최근에 읽었다. 일자리를 나눠 갖는 측면, 휴식을 통한 새로운 관심사의 개발과 이를 겨냥한 다양한 신산업의 창출 측면에서 주 이틀 휴무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 이틀 휴무제는 무엇보다 개인을 좀 차분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다가도 한 이틀 쉬고 나면 덜 각박해진다. 개인이 차분해지면 나아가 국가도 좀 차분해지지 않을까. (물론 더 중요한 건 불필요한 갈등의 생성 구조를 개선하는 일이지만)

영국이라는 나라를 개인의 삶에 비유하면 노년기나 장년기에 해당한다. 끓는 피, 정열은 부족하지만 꾸준함이 돋보인다. 한번 하기로 한 일은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일관되게 처리해 나간다. 우리는 끓는 피가 넘치고 차분한 추진은 다소 모자라다. 이를 완화하는 방안의 하나로 주 이틀 휴무제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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