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만난 독일기자, 미국기자

<김현종의 영국이야기 6>

등록 2000.12.06 12:56수정 2000.12.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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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과 제리가 이달말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다. 이들에게는 이번 학기가 마지막 학기다. 로이터 화운데이션 프로그램의 초청 연구원은 모두 12명. 이중 크리스틴은 독일에서 왔고 제리는 미국에서 왔다. 나를 제외한 11명 연구원의 국적은 10개국. 이들에게서 어떤 흥미로운 얘기를 듣거나 또는 그들 자신의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문화의 차이와 그 나라의 장래를 점쳐보곤 하는 게 요즘의 숨은 재미다.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다. 예컨대 인도는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엄존하며, 영자지 신문기자라는 조금은 선진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도 부모의 중매로 같은 카스트의 남자와 결혼을 한다는 사실, 미국의 앨라바마 주는 고교 졸업자의 26%만이 대학에 진학하며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효과적인 직업 교육이 절실하나 군사시설지역과 대 화학회사의 점유로 인해 마땅한 사업체가 들어서기 어렵다는 사실, 우크레이나 사람들은 러시안에 대해 몹시 언짢은 감정을 갖고 있으며 그럼에도 공산주의가 붕괴한 요즘에도 주요 문화와 언론, 정치체제에서 러시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 (한 사람의 경우와 이야기를 통해 그 나라에 대한 보편적 관념을 갖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나라에는 그런 경우도 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만 관념적으로 읽고 들어 알던 때와 달리 실질적인 첫 접촉, 경험의 효과는 자못 크다. 한편으로 부담도 느낀다. 동료들이 한국에 대해 최소한 나쁜 인상은 받지 말아야 하는데.)

크리스틴과 제리는 인간 탐구와 이를 통한 그 나라 맥락 짚기의 측면에서 가장 많은 흥미를 준 '친구'들이다. 먼저 크리스틴. 33세. 기혼. 160센티미터, 55킬로그램 이상. 내가 신체 치수까지 알게 된 것은 순전히 그녀가 늘 입고 다니는 '인민복' 때문이다.

내가 본 그녀의 옷은 두 벌인데 하나는 우중충한 감색의 작업복이고 하나는 빨간 체크 무늬의 치마와 두툼한 외투가 한 차림인 옷이다. "그 옷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마오(모택동)가 입던 옷 같애." 내가 농담을 걸자 그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95년인가 오스트리아 빈의 대학가에서 싸게 샀는데 싸고 편해서 입고 다닌다고 했다.

그 옷은 한편으로 우리의 개량한복과 비슷하다. 개량한복 중에서도 광택이 있는 옷이 아닌 막노동하기 좋은, 두툼해서 겨울에도 입기 편한 그런 옷 말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옷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며칠 있다가 "하나 구할 수 있으면 구해달라"고 했다. 그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나는 50달러 이상은 지출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독일 사람이 검소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런 식으로 직접적인 말을 들으니 조금은 황당했다. 나는 그녀에게 대강의 치수를 물어본 다음 서울의 친구에게 이 건을 문의했고, 7만원 정도 한다는 대답을 듣고 이를 전했다. 그 옷은 그녀의 귀국에 맞춰 지난 주 전달됐다.

크리스틴과 나는 옥스퍼드 대학의 한 공식 디너석상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적이 있다. 로이터 프로그램과 울픈슨 칼리지의 '젊은 외교관 과정'이 함께 세미나를 할 때였다. 젊은 외교관 과정에서는 말 그대로 각국의 20대말 30대초의 젊은 외교관 30여명 정도가 1년 과정으로 공부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외무고시 출신의 젊은 외교통상부 사무관과 재미 교포의 딸이자 유엔 기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씩씩한 여성 등 2명이 있다.

이 식사 석상에서 나는 크리스틴의 또 다른 점을 발견했다. 6명이 한 조인 테이블 석상에서 크리스틴은 전형적인 등거리 외교를 보여줬다. 아무도 소외당하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나서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하고 겸손하게 말을 걸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남아공에서 온 흑인여성 외교관도, 폴랜드에서 온 미남 친구도, 파키스탄의 장차 외무장관도 기분이 다 좋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독일을 많이 홍보하거나, 헤어질 때 자기 명함을 나눠주며 인맥 구축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남아공 여성과는, 그 여성이 내는 휘파람 소리도 아닌 희한한 동물 울음소리 흉내에 마냥 좋아했고 - 줄루족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 파키스탄 사람과는 무슬림의 평범하면서도 진지한 하루 일과를 주제로 얘기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다소 소란스러운 틈을 타 나는 "역시 외교관들이 매너도 좋고 말도 많아, 기자들은 세계 어딜 가나 심각하게 토론하거나 술먹는 게 특징인데"라며 농을 걸었다.
"크리스틴 너 알고 있냐, 외교관들이란 '자기 나라를 위해 거짓말을 하도록 훈련된 (개인적으로는) 정직한 사람'이야."
그러자 크리스틴은 웃으면서 "사실이 그런 면이 좀 있지"하더니 "우리 아버지가 외교관이셨어"하는 것이었다. 다소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로써 크리스틴이 모든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비결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우리 연구원 중 유일하게 젓가락을 쓸 줄 아는 서양 사람이다.

내가 크리스틴에게 감탄한 것 또 하나는 그녀의 현재 직장이 동독계 월간지라는 점이다. 솔직히 크리스틴은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 독일의 언론 매체 중에서도 주류인 서독계 유력 매체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세계 10여국에서 생활했고 박사 학위도 갖고 있다. 영어, 불어, 폴란드어, 러시아어에 독어를 합쳐 5개국어를 하는 재원이다. 그런 친구가 동독계 월간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수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정상급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일하는 월간지, 다스 매가진은 과거 동독이 공산주의 정권일 때부터 발행되던 잡지로서 현재도 동독출신 독일인들, 이른바 오시들이 주 독자다. 그녀가 11월 2째주 자신의 발표 시간에 참고 자료로 나눠준 그 잡지를 유심히 뜯어보니 주로 문화 측면에서 글감을 선택하는 것이나, 차분하면서도 다소 도전적인 디자인이 굳이 한국의 예를 찾자면 지금은 없어진 70년대의 뿌리깊은 나무를 연상시켰다.

그날 나는 크리스틴의 발표시간에 질문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할 수 없었다. 감독인 G씨가 "너 왜 오늘은 질문을 하지 않느냐"는 의미의 눈길을 두어 차례 보내왔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오후에야 연구실에서 다시 만나 그녀에게 "너희 나라의 두 가지가 부럽다"고 했다.

하나는 과거 동독이 그러한 민영 잡지의 발간을 허용해준 점이다.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민영의, 문화를 중심으로 한 종합 교양지의 발행을 허가해 준 동독의 풍토가 솔직히 부러웠다. 또 하나는 대 언론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언론이면서도 결코 황색언론이 아닌, 교양지가 상당한 부수로 발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과거부터의 동독계 잡지가. 다스 매가진은 통일 후에도 죽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월70만-80만부가 발행되고 있다는 게 크리스틴의 전언이다. 결국 다스 매가진의 오늘은 편집진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동독 정부와 통독 정부의 관용의 토양 위에서 생긴 것이다. 나는 그것이 부러웠다.

제리는 나에게 미국사람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과묵함이다. 내가 갖고 있는 미국 사람과는 이미지가 영 달랐다.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국가로서의 수퍼 파워적 이미지와는 좀 다르다. 미국 사람은 사실 말이 좀 많다. 어제 처음 만난 사람하고도 오늘 친한 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떠드는 편이다. 미국의 공직자들, 교수들도 상당수가, 순전히 사적 경험이지만, 아무 데서나 허겁을 떠는 텔레비전 속의 미국인들만큼은 아니지만 동양 사람에 비해서는 말이 많은 편이다. 미국의 주도층들이 밖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처럼 가볍지는 않고 교양 있으면서도 부드럽다. 특히 사석에서.

그런 나에게 아일랜드 계통인 제리는 내가 만난 최초의 과묵한 미국인이었다. 그는 누가 묻기 전에는 통 말이 없다. 그러다가도 말을 하면 대단히 진지하다. 제리는 나이가 50이 넘고 키가 6척 장신인 점까지 과묵함과 보태져 나에게 전혀 새로운 미국인으로 다가왔다. 그의 영어 발음부터 낯설었다. 강약이 거의 없는 미국식 영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솔직히 나는 처음 한달간 제리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제리는 고민하는 미국 지성인의 면모를 보여줬다. 그는 미국의 유력지인 보스톤 글로브 신문의 탐사보도 팀장인데 스스로 데드라인 저널리스트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번뜩이는 순발력과 민첩함으로 승부를 거는 것은 자기와 거리가 멀다고 했다. 그는 대신 장기간에 걸친 탐사보도에 주력했다. 보스톤의 일부 부패 공무원들과 암흑가 사람들이 결착돼 저지른 예산 비리를 폭로해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제리의 과묵함과 침착함은 미국의 다양성을 알게 해줬다. 하기야 수퍼 파워를 만들고 일궈온 사람들이 어찌 다 텔레비전의 코미디언 같을까.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도시의 기질적인 면에서도 제리가 일하는 보스톤은 독특해 보인다. 하바드 대학을 비롯해 학구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미국의 이민 초기 전통이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백인, 앵글로 색슨족, 프로테스탄트'의 합성어인 WASP의 본향같은 곳이다. 어쩌면 그는 웃음과 친절로 가장하지 않은 미국 주도층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인지 모른다.

나는 제리를 본 이후 "언젠가 미국의 또 다른 진짜들을 만나러 가야지"하는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제리가 지난주 어느 저녁 우리 집에서 있는 조그만 파티에서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학기말의 심리적 이완일까. 마침 우리 작은 딸애가 만들어 놓은 색종이 왕관이 눈에 보이자 시종 그걸 머리에 쓰고 아이처럼 좋아하며 개그맨처럼 굴었다. 그런가 하면 그날 오후 형편 없는 주제발표를 했던 영국 국회의원 모 씨를 앞장서 씹어대 나머지 연구원들을 즐겁게 동참토록 하는 한편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제리를 '과묵하고 진지하되 직선적인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 제리는 나에게 "최근 들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슬펐던 날이 언제였냐"고 물어온 적이 있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뉴스를 기억하고 물어보나' 싶기도 했고, 그러나 내가 먼저 그런 날이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얘기하기는 좀 창피해 "아마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던 날일 것"이라고 답변해 줬다.

"경제 주권을 상실한 날이라고 애도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인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다. 자의든 타의든 한국은 그 이후 세계화가 많이 됐다"고 하자, 그는 "세계화는 필연적인 것이며 한국이 이로 인해 잃는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또는 국제금융자본 중심의 세계화가 인류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과묵한 제리의 진지한 답변은 미국 주도층의 보편적 생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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