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5백년만에 꿈꾸는 21세기의 도약 - 2

<김현종의 영국통신 9>

등록 2001.01.10 11:51수정 2001.01.10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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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을 울린 아르헨티나의 쇠고기

말라가에서 들른 백화점 식료품 매장에서는 무려 20가지의 쇠고기를 보았다. 우리 식으로 하면 안창, 사태, 등심, 안심, 홍두깨 등등. 스페인 사람들이 17세기경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 본격 정착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것 중의 하나가 소 키우기 좋은 기후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식품 매장에 있는 쇠고기중 상당수는 아르헨티나에서 냉동선을 타고 온 고기였다. 돈 있는 사람은 살짝 얼린 국산(스페인산) 냉장육을, 돈없는 사람은 바짝 얼린 남미산 냉동육을 먹는다.

아르헨티나의 쇠고기를 생각하니 중학생 시절 라디오 연속극에서 들었던 한국인의 아르헨티나 이민기가 떠올랐다. 60년대중반 박정희정권이 남미 농업이민을 권장해 10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남미로 건너갔다. 이들이 현지에 도착해 가장 놀란게 쇠고기 내장과 꼬리, 뼈는 먹지도 않고 버리는 것이었다.

고기가 워낙 풍부하니까. 한국사람끼리 이를 도살장에서 공짜로 얻어다가 곰탕, 설렁탕, 꼬리곰탕, 내장탕, 내장무침, 곱창구이를 실컷 해먹고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쇠고기가 질립니다, 너무 고기를 많이 먹어 길수 엄마는 어젯밤 곰탕 국물을 수채에 버릴 정도로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안심시켰다나.

한국 사람들이 쇠꼬리나 뼈, 내장을 먹기 시작하면서 아르헨 사람들도 이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해 돈을 받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소에 대한 명상(?)을 자극한 검정색 황소 입간판은 그후 스페인을 떠날 때까지 심심하면 도로상에 나타났다. 마치 과속 주의 입간판처럼. 셈을 좋아하는 작을 딸 말로는 모두 26번을 보았다는 것이다.

기착지인 빌바오에서 300킬로쯤을 서쪽으로 달려 도착한 곳은 천주교의 명소중 하나인 꼬바동가. 주 도로에서 빠져나와 좁은 골짜기를 한참 달리면 산꼭대기에 엄청나면서도 정교한 성당이 나타난다. 만일 천국으로 오르는 꼬불꼬불한 계단이 있고 그 계단 끝에 천국성(天國城)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면 바로 이 모양새를 취하고 있을 성싶었다. 유럽의 특징인 붉은 벽돌과, 짙고 엷은 잿빛의 대리석으로 건축되었다. 성당 경내에는 잔잔한 미소를 담은 수녀들과 신부들이 오간다.

그중 가장 마음좋게 보이는 신부님에게 설명을 요청하니 그 신부님은 내가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하자 이태리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독일어를 할 줄 아느냐고 잇따라 묻더니 포기했다. 더듬더듬이라도 할줄 아는 서양말은 영어가 유일한데 신부님은 하필 영어만 못하는 묘한 처지였다.

꼬바동가의 지리적 위치부터 설명하자면 이곳은 스페인의 서북쪽 끝에 가깝다. 그 끝에는 예루살렘, 로마과 함께 카톨릭의 3대 성지에 해당하는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가 있다. 예수의 12제자중 한 사람인 야고보가 예수의 사후 이곳에까지 와서 포교 활동을 했다는 전설이 9세기 무렵부터 퍼지면서 산티아고는 프랑스, 독일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순례의 필수 코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야고보는 영어식으로 제임스에 해당한다. 신약성서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이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의 형제로서 또다른 야고보라고 알려진다. 산티아고의 야고보는 12사도중 요한의 형제이다.

어쨌든 이 야고보가 멀리 스페인끝에까지 와서 선교했다는 전설은, 이성과 신앙중 신앙이 득세한 중세 유럽인들의 관심을 이끌기에 충분했으니 당시로서는 이미 예루살렘을 점령한 투르크 족의 반대로 인해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세속화한 로마와 달리 조그만 시골인 산티아고는 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심을 발현하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로는 이교도와 산적의 출현 속에서 시골길을 몇천리 걸어야 하는 순례길, 힘든만큼 신에게 다가가는 희열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꼬바동가는 바로 남프랑스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에 이르는 이 성지순례 루트와 직결돼 있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근세 스페인 사람들의 신앙심을 담은 상징물이다. 생각해보면 신앙심이 아니고는 돈 만으로 이 산꼭대기에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대성당을 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페인 종교민족주의의 요람 꼬바동가

꼬바동가는 또한 기독교 국가로서 스페인 왕국의 요람이기도 하다. 마호멧이 이슬람 신앙을 창시한지 불과 백년이 안 돼 무슬림들은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왔다. 요즘에야 한손에 코란, 한손에 칼을 든 정책이 그리 가혹하지만은 않았다는 인식이 서서히 퍼지고 있지만 어쨌든 생전 보지도 못한 무어인들의 유럽 진출은 유럽의 게르만족과 이들이 막 신봉하기 시작한 기독교 신앙에 엄청난 불안요소였으리라.

바로 이 때, 이베리아 반도를 거의 점령한 무슬림들이 반도 서쪽 끝의 마지막 정복전쟁에 열중할 때 게르만 족의 일파인 비시고딕족의 추장이자 기독교도인 페야요가 꼬바동가 지방에서 분연히 기독교 군대를 모은다. 그리고 722년 전투에서 무어인을 격퇴시켜 이 지역은 무슬림 이베리아 반도의 한 점 섬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이 왕조를 시작으로 프랑스와의 국경지방, 반도의 중부지방에서 차차 기독교 군주들이 나타나면서 무슬림들은 점차 패권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리로 치면 꼬바동가는 가야의 첫 출발범인 김해라고 할까.

그런 식으로 비유하면 나중에 기독교 국가로 이베리아 반도를 재통합한 중부지방(마드리드 인근)의 카스틸랴왕국은 신라와 경주 쯤에 해당할 것이다. 꼬바동가의 성당은 이런 역사를 감안해 19세기 후반 722년의 격전지에 성당과 동굴 성소를 만들어놓았다. 푸른 색 스테인드 글라스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성당이다.

이 성당에서 발견한 것중 하나가 화장실. 성당 본채와 떨어진 옆마당에 성당의 건축 양식인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에 맞게 예쁘게 지어놨다. 불과 4평정도의 공간인데도 함부로 짓지 않고 성당 건축 양식대로 정석대로 고풍스럽게 지어놓은 것이 특징적이었다. 마치 옛 법도대로 지은 명승고찰의 해우소(解憂所)를 보는 느낌을 주었다. 남자와 여자 칸 구분이 없고 문이 없는 것이 또한 특징. 조그만 쪽담을 문대신 사용하고 있었다.

그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을 보고 나서 일어나자 멀리 기혼 지방의 평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겨울에도 연녹색을 잃지 않는 스페인의 북부 평원, 특히 꼬바동가와 인접 갈리시아는 중부 스페인과 달리 강우량도 제법 있어 소나무, 사철나무등 숲이 무성한 곳이다. 해발 700미터쯤의 탁 트인 전망을 옆에 두고 일을 본다는 것은 또다른 감흥이었다.

꼬바동가 얘기를 계기삼아 스페인의 정치사를 좀더 살펴보면 일부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이 나라도 정치적 우세지역과 경제적 우세지역이 구분돼 있다. 예컨대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한 마드리드는 현재 정치의 중심지이고 경제의 중심지는 지중해 인근 항구도시인 바르셀로나이다. 중국의 경우 정치의 북경 (또는 화북지방), 경제의 상해(또는 화남지방) 으로 구분이 뚜렷하다. 일본도 막부 정치에 종말을 고한 것은 사즈마현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방이었고 이들은 2차 대전 종전까지 일본의 정치를 주름잡았다.

스페인의 경우 꼬바동가, 그리고 인접한 갈리시아 지방등 북서부 지역은 중세 이후 현대까지 정치권력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꼬바동가에서 조그만 기독교 왕국이 처음 탄생해 전체 이베리아 반도를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을 시발로 역대 권력은 대체로 반도의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 출현했다.

가장 탐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접한 갈리시아 지방이다. 스페인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프랑코 총통의 고향이자 스페인 해외 진출의 인적 공급원이다. 나폴레옹의 출생지인 코르시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 상모리와 함께 기억될 만한 고장이다.

변방 갈리시아의 소년, 프랑코

프랑코. 현대 유럽사와 스페인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존재. 그는 갈리시아의 조그만 도시 엘 페롤에서 1892년 태어났다. 엘 페롤은 해변도시이자 제국 함대의 근거지인인 해군 기지. 그는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의 이어받아 해군이 되려 했으나 해군 사관학교의 정원이 감축됨에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마드리드 남쪽에 있는 톨레도의 보병사관학교에 입학한게 훗날 군인 독재자로서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는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시작된 식민지 전쟁에의 출전을 지원해 1912년 19세의 나이로 현지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모로코 출신 기병의 정예 연대에서 중위로 승진했다. 스페인의 많은 장교들이 무질서하고 직업 군인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에서 젊은 프랑코는 부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임으로써 상급자들에게 인정받는다.

그는 부대작전을 준비하는 데 대단한 정성을 쏟았으며, 돈에 관심이 없고 부대원들의 복지에 보통 이상의 관심을 기울였다. 내성적이었으며, 가까운 친구가 적은 편이었고 천박한 오락을 기피했다는 기록들은 어딘지 청년 박정희와 유사한 점이 느껴진다.

스페인 사람들은 프랑코의 이런 기질을 독실한 카톨릭 교도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는 한편 질소검박한 갈리시아 사람 특유의 성격으로 이해한다. 1915년에 그는 스페인 육군에서 최연소 대위가 되었다. 이듬해 복부에 탄알이 박히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1920년 그는 새로 편성된 스페인 외인부대의 부사령관으로 뽑혔고, 1923년 사령관직을 물려받았다. 그가 지휘하는 외인부대는 모로코 반군과의 전투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코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1926년 33세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1931년 스페인의 군주제가 무너진 후 그의 장래는 암담해진다. 스페인의 새 공화국은 한국의 제2공화국처럼 민간인 위주의 정책을 펴나가고 그 결과 육사가 해체되고, 프랑코의 이름은 대기 장교 명부에 올랐다. 나중에 우파 정권이 출범하면서 다시 현역에 복귀하고 1935년에는 스페인 육군의 참모부장으로 임명되는 등 성공적 군인의 길을 걷지만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반감은 이때부터 더욱 깊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스페인 정국은 1936년 총선을 계기로 완전히 좌익과 우익으로 양분된다. 총선 결과 좌익이 승리했지만, 신정부는 스페인의 사회·경제 구조의 가속화되는 붕괴를 막을 수 없었다. 프랑코는 정부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진정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한직인 카나리아 관구 사령관으로의 전출. 결국 그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에 무력으로서 대항하는 반군의 지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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