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5백년만에 꿈꾸는 21세기의 도약 - 1

<김현종의 영국통신 9>

등록 2001.01.10 10:54수정 2001.01.1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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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소와 프랑코의 추억을 더듬어

떠나는 날, 옥스퍼드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왔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은 그래서 어둡고 추웠다.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 비행기를 이용해 막바로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말라가 같은 스페인 도시로 가는 방법이 1안이다. 육로로 간다면, 프랑스를 경유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기차나 승용차로 가는 방법이 있다.

나는 제3의 방법을 선택했다. 영국 해군의 基港(기항)이었던 포츠머스에서 스페인 북부의 광산도시 빌바오로 카페리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평소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끌고 가기로 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영국- 프랑스-스페인을 잇는 육로 이동은 거리가 너무 멀어 부담이 됐다. 갈 때만 영국-스페인 간의 해로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포츠머스에서 빌바오로 가는 페리는 일주일에 두 편. 2000년 12월 19일 수요일 오후, 옥스퍼드에서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포츠머스항에 도착, 차를 배에 실었다. 영국 사람들은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다. 출발시간 3, 4시간 전부터 항구에 도착해 차를 일렬로 세워놓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린다.

밤 8시 차량 승선을 마치고 '프라이드 오브 빌바오' 호는 서서히 대서양을 향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1만5000톤급. 600여개의 선실. 동양 사람이라고는 우리 가족밖에 없는 단촐한 항해였다.

선실의 조그만 창을 통해 비좁게 보이는 대서양의 밤바다를 바라보니 잠이 통 오지 않았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유럽에서, 그것도 자동차를 가지고 다니며 일일이 길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에 家長(가장)으로서 머리 속으로는 이런 저런 시뮬레이션을 해야 했다. 출발전 많이 들은 대로, 나중에 체험한 대로 스페인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여행의 두번째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사방은 푸른 바다였다. 파고 2-3미터의 북대서양 바다가 보였다. 갑판에 나가니 망망대해라는 말이 실감났다. 바닷물은 태평양이나 한반도 주변의 동서남해 바다와 달리 검푸르고 무거워 보였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지은 바다

낮 12시쯤에는 "프랑스 쪽, 배의 진행 방향으로 볼 때 왼쪽으로 돌고래 서식지가 있으니 지켜보라"는 선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멀리 히끄무레하게 프랑스의 브레타뉴 지방이 보였다. 2차 대전때 연합군의 상륙지점인 노르만디 해안은 새벽에 통과했다.

영국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프랑스의 서쪽 대서양 바다는 유럽의 현대사가 담긴 바다다. 1588년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바로 이 바다에서 물리치고 서서히 세계의 제해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1804년에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넬슨의 영국 함대에 맞서서 또 한번 중요한 해전을 벌였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압력에 못이겨 영국에 대항했다가 패배를 맞았다. 넬슨 함대가 진격해 옴에도 동맹의 주축인 프랑스 함대는 나타나지 않았고, 스페인 함대 혼자 영국에 맞섰으나 스페인 함대 사령관은 배를 처음 타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이기면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은 점차 빛을 잃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특히 대륙 봉쇄령에 비협조적인 러시아를 치러 갔다가 러시아군 아닌 冬將軍(동장군)에게 패배한다. 트라팔가 해전은 나폴레옹 제국 붕괴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2차 대전 때에는 독일군의 U보트가 이 바다에서 많은 연합국 상선을 침몰시켰다.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이 2차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자 영국과 미국은 스페인을 은연중 보급 및 연락 기지로 활용하려 했고 히틀러는 반대로 프랑코에 대한 괘씸함을 담아 이 해역을 U보트로 철통 봉쇄했다.

프라이드 오브 빌바오는 이런 역사를 담은 바다를 서서히 꾸준히, 시속 12노트(1노트는 1852미터에 해당한다)로 항해했다. 배에는 두 갈래의 파도가 달려온다. 앞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피칭이다. 옆에서 몰아치는 파도는 롤링이다. 멀미를 일으키는 것은 피칭보다 롤링이 심하다. 속이 다소 역겨움을 느꼈으나 갑판에서 머무르며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으로 풀었다.

배는 2층부터 5층까지가 객실 전용이고 6층부터 8층까지는 고급 객실과 식당, 면세점, 영화관 등 부대시설이 있다. 한번에 대략 천 명 정도를 승선시키는 것 같았다. 이 배는 영화에 나오는 유람선이 아닌 카페리라서 끼니를 구내 식당에서 모두 사먹어야 했다. 영국 선적의 배지만 식당이며 면세점 종업원은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다. 임금이 다소라도 낮은 나라가 노동력을 담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국가간의 경제력 차이가 이렇게 나타나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

배에는 조그만 카지노가 있다. 구경삼아 들렀더니 딜러와 지배인 모두 얼굴이 까무잡잡한 동양인이었다. 손님도 없이 한가하길래 게임은 안 하고 몇 마디 말을 시켰더니 답변을 곧잘 한다. 올해 26살의 마르가렛트는 종업원 모두 필리핀 출신이라고 했다. 왜 필리핀 사람일까. 손재주가 있고 언어가 통하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필리핀은 300년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다가 20세기 들어 미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스페인어와 영어에 모두 익숙한 것이다.

물가는 여전히 비쌌다. 영국 배이기 때문으로 이해했다. 배나 항공기는 도착 지점에 이르기까지는 소속 국가의 영토가 확장된 것과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을 타고 가면 미국 도착 때까지 한국 말하고 한국 음식 먹고 한국인 승무원의 도움을 받지 않는가.

종업원들은 밥을 시키면 서툰 스페인식 영어로 응답한다. 한끼 5파운드짜리 국수나 미트를 시키면 맥도널드 햄버거 정도의 질과 양에 해당하는 밥을 주었다.

세번째 날 아침, 겨울의 북대서양은 아침 8시쯤 해가 뜨기 마련인데 새벽 5시부터 안내 방송이 여러 차례 나오고 부산했다. 배는 예고된 대로 출발 34시간 30분만인 새벽 6시 30분 가스코뉴만을 거쳐 빌바오 항에 도착했다. 빌바오는 코크스 등 석탄, 철광이 많이 나는 도시이자 바스크 지방의 주요 도시이다. 바스크 주민의 일부는 오늘날에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테러를 하고 있다.

투우와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공통점

새벽 7시, 아직 어두컴컴한 가운데 300여 대의 차량이 고래 뱃속에서 나오는 생선떼마냥 카페리의 관문을 통해 스페인 땅을 향하기 시작했다. 새벽 안개도 새파랗고 자동차 뒤꽁무니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도 새파랬다. 온통 검푸름의 연속이다.

드디어 스페인 땅. 첫 환영객은 빌바오항에 주재하는 출입국 관리들이었다. 영국에서 오는 배이기에 대부분 영국과 스페인 사람만 타고 있어 같은 EU국가로서 검색은 형식적이다. 우리 차례가 되자 녹색 경찰 정복에 콧수염을 기른 스페인 경찰은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명의의 여권을 보고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수르 꼬레아(남한)' 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하니 또 다시 '남한이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고 묻는다. 수르 꼬레아와 노르테 꼬리아(북한)중 어느 쪽이 어느 쪽인지 헤매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르 꼬레아가 서울 꼬레아"라고 답변해 주니 그때서야 얼른 알아듣는다.

선창을 벗어나자 빌바오의 공장 굴뚝들이 환영해 주었다. 100미터 이상으로 높게 오른 굴뚝 끝에서 파란 불꽃이 일자 아이들은 신기해 했다. "저건 코크스나 중유 찌꺼기가 타는 거란다" 설명해 주었지만 자신은 없었다.

스페인의 도로 상태는 그저 그랬다. 그보다도 스페인 땅에서 처음 부딪친 난제는 운전석과 車道(차도)의 방향 선택이었다. 알다시피 한국은 자동차의 운전석이 왼쪽에 있고 도로를 오른쪽으로 달린다. 예컨대 경부고속도로 대전에서 서울을 향한다 치면 중앙선 오른쪽 길을 달린다. 영국은 반대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중앙선의 왼쪽 길을 달린다. 스페인은 운전석도 차도 선택도 한국과 같은 방식이다.

우리 가족이 직면한 고민은 바로 여기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소나타이긴 하지만 영국에서 타도록 제작된 차라서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를 운전하며 차도는 거꾸로 달려야 했다.

아마 2000년에 치른 가장 큰 경험 중 하나가 바로 이 상이한 세 가지의 주행 경험이리라. 한국식, 영국식 주행경험을 경험한 데 이어 세밑에는 한국제 영국식 자동차로 한국과 같은 주행방식을 또 다시 실습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이 3가지 말고 또 다른 주행방식은 없냐"고 신기해 한다.

서쪽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처음 찾은 곳은 알타미라 동굴. 스페인 말로 쿠에바스 알타미라. 빌바오에서 서쪽으로 2시간을 달려 도착했지만 입구에 표지판조차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고 허술했다. 길을 물어보며 시골의 가게 주인과 얘기를 시도해 보니 영어는 ABC도 모른다. 물어물어 찾아가니 벽화 원본 관람과 동굴 출입은 3년전에 서면으로 신청해야 한단다. 대신 진짜와 똑같이 만들어 놓은 복사본 벽화와 비디오를 보겠냐고 묻길래 기념관만 보겠다고 하고 거절했다.

기념관만 봐도 충분했다. 알타미라 동굴은 길이 18미터 폭 9미터 정도의 움푹 파인 동굴인데 19세기말 건물 신축 공사를 하다가 주민들에 의해 발견했다. 기원전 1만5000년전 원시인들이 수렵하며 그린 천연색 황소 벽화가 유명하다. 유럽의 회화사를 중심으로 편집된 세계 미술사에 첫 장에 해당한다. 비슷한 그림이 인근 남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에서도 발견됐다.

스페인 사람과 소는 무슨 관계였을까. 다음 목적지로 향하며 고민하는데 멀리 나즈막한 언덕 위에 검정 소 형태의 입간판이 크게 보였다.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에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 두 채만한 크기의 광고판처럼.

"맞아 스페인은 소가 특징이야, 투우도 그렇고 알타미라 동굴 벽화도 그렇고". 왜 지금껏은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스페인의 상징 투우를 따로따로 떼어놓고 생각했을까. 하기야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는 알타미라 동굴이 스페인에 있다는 사실도 가물가물했지만.

스페인과 소의 얘기는 좀더 이어진다. 이들에게 소는 육식의 상징이자 동물의 상징이다. 스페인에서는 개나 고양이가 영국처럼 흔하지 않다. 오랜동안 이들의 주산업은 소를 연간 강우량 400-500 밀리미터의 광야에 방목하는 것이었으며(지금은 올리브, 포도 재배 및 포도주 생산과 관광이 주산업이다) 쇠고기를 가장 즐겨 먹고 소와 투우를 한다. 지금은 이태리에 뒤지지만 이 나라의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 중의 하나가 모피, 가죽 산업이었다. 이것도 소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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