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의 창문' 리가, 그 800년의 역사

라트비아, 리가 그리고 리보니아

등록 2001.10.01 04:55수정 2001.10.0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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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가 공식적으로 정도 801주년이 되는 해이다. 리가는 전쟁 같은 인공적인 피해는 비교적 적게 입었지만, 천둥이나 화재 등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가 많아서 1200년대 초 중세시대에 지어진 상태 그래도 이어져 내려오는 건물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딕양식이 주를 이루는 유럽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건물이 그 이후로도 많이 지어져 전 세계 관광객들을 매혹하고 있다.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8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는 그리 많이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800년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래된 도시로서의 역량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라트비아에서는 그 리가의 역사가 '불과' 800년이 아니라 더 오래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라트비아의 창문, 리가의 800년 역사의 시작은, 1201년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 알베르트(라트비아어로 Alberts)가 현재 리가 지역에 상륙하여 이 지역을 무역거점지역으로 건설하고 자신의 기사단을 발족하여 발전시키기 시작하던 때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 당시에는 '라트비아'라는 국명의 나라는 유럽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고대 리투아니아처럼 지역에 따라 여러 나라들로 분할되어 존재하고 있었는데, 알베르트는 현재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통합하여 '리보니아(Livonija)'라는 이름의 새로운 독일 영토를 건설하였다. 리가는,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함께 리보니아의 주요도시로서, 또 중세유럽의 무역도시 연맹이였던 한자동맹의 주역도시로서 맹주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그 알베르트가 리가에 상륙했을 때, 그 리가에 사람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면, 리가의 역사가 800년이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라트비아는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그 지역엔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고, '리가'라는 이름의 도시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말은 설득력을 잃는다.

13세기 초에는 라트비아에도 리투아니아처럼 전체에 지역별로 여러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알베르트가 리가에 상륙한 1201년에는 리가 주변지역으로 리브인(라트비아어로 libiesi)이라는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주로 어업과 목축에 종사하던 이 리브인들 외에도 쿠르인(libiesi), 라트갈레인(latgali) 등의 민족이 지역별로 흩어져 존재하고 있었다.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리브인들은 현재 리투아니아나 라트비아인들 같은 발트인종이 아니라 핀란드나 에스토니아인과 혈통이 비슷한 핀우그르족이었다고 한다.

리브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은 현재 에스토니아의 대부분 지역과 라트비아의 해안지역이었으므로, 당시 라트비아에서는 다른 발트인들에 비해 인구비율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만, 독일인들과 접촉이 많았던 해안지대에 거주했던 이유로, 알베르트는 그 지역을 전부 '리보니아', 즉 '리브인들이 사는 땅'으로 이름을 붙여버리고 만다.

리브인들은 독일인 진출 이후 독일인들과 동화되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정작 사라져 버리고 말지만, 리브인들과 많은 관련이 없는 발트인들의 지역까지 그 '리브'인들의 이름을 따서 리보니아라 불리게 된다.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리브인들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도시가 라트비아의 유명한 관광도시 '시굴다(Sigulda)'라는 곳인데, 그들의 지역을 점령한 독일인들과 시굴다를 관통하는 가우야(Gauja) 강을 사이에 두고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많은 싸움을 벌인 곳이다.

그 시굴다 외에도 현지 발트인들과 그 무역거점지를 차지하기 위한 독일,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등 외부침략자들과의 싸움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독일인들은 리투아니아까지 그 리보니아나 프러시아의 일부로 편입시키고자 부단히 애를 썼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 사라져 버린 것으로 알려진 리브인들은 다행히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리브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리가에 가면 그 리브어로 발간되는 신문이 간행되어 나오고 있다. 물론 신문가판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신문은 아니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신문으로 꾸준히 발간되고 있다. 그 신문 뒤편에 적혀있는 리브어를 구사하는 얼마 안되는 사람들의 명단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리가의 정도 800주년에 대한 이론은 말한대로이다. 이번 800주년 행사를 기념하여 리가시측에서 알베르트 대주교의 동상을 세우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는데, '리가를 정말 세운 사람이 알베르트가 맞느냐 아니냐' 하는 복잡한 이유로 잡음이 많다고 한다. 어쨌든 그 알베르트 대주교 덕분에 리가는 그 후로부터 리보니아 지역에 진출한 발트독일인들의 거점도시이자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명성을 얻게 되며, '동유럽의 빠리', 최근에는 '동부의 라스베가스' 등으로 불릴 정도로 발전을 누리게 된다.

▲ 검은머리전당. 아직까지 복원사업이 진행 중인 건물이다. ⓒ 서진석
그 리가의 화려한 역사를 잘 보여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리가의 구시가지(라트비아어로 베츠리가 Vecriga)에 있는 '검은머리전당(Melngalvju nams)'이라는 건물이다. 라트비아 점령박물관 바로 옆에 있는 장식이 아주 화려한 건물인 이것은 중세시대의 무역인 모임 중의 하나인 '검은머리길드'가 사용한 무역활동의 중심지였다.

이름이 '검은머리'인 이유는 그 길드의 수호신이 모리셔스 출신의 흑인 성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14세기 경엔 검은머리 길드 회원들이 건물을 임대하여 썼고, 그 후 그 건물을 구입하여 지금과 같은 장식이 화려한 건물로 둔갑시켰으나 1948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2001년 현재 거의 완전히 복원되어 관광안내소, 콘서트홀 등으로 개방이 되었는데, 지하에 있는 '검은머리길드'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에 가보면 그 당시 리가에 거점을 둔 무역활동의 범위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역사상에는 라트비아, 엄밀히 말하자면 리보니아의 라트비아 영토에 살았던 발트독일인들이 17세기에 남아메리카의 토바고나 감비야까지 이르러 식민지를 건설한 기록이 남아있다. 토바고에 있는 한 섬은 그 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발트독일인 영주 '예캅스(.Jekabas)'의 이름을 딴 '예캅스섬'이라는 것이 있고(라트비아 서적에서 얻은 정보이므로 토바고 현지어로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불리던가?), 예캅스의 출신지역이었던 쿠제메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민족까지 있다고 한다.

그런 어마어마한 범위의 무역중심지로 발전한 리가는 당시 중세유럽양식의 건축양식인 고딕양식의 대표적인 도시로 유명하지만, 고딕양식 외에도 바로크, 그리고 스탈린(?)양식의 소련식 건물도 남아있는 재미있는 도시이다. 13세기 라트비아 건축양식을 비교적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건물은 성 야콥교회(라트비아어로 Jekaba baznica)와 성 베드로교회(Petera baznica), 알베르트의 집무실로 건설되었다가 교회로 바뀐, 유럽에서 가장 큰 오르간으로 유명한 돔성당(Doma baznica) 등이 있다(돔성당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양식이 골고루 혼합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 성 베드로 성당. 벼락을 몇 번 맞은 이 교회 첨탑은 한때 유럽 최고(最高)였다. ⓒ 서진석
1209년 건설된 것으로 알려진, 그 유독히 긴 첨탑으로 리가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성 베드로교회 뒤편으로는, 그림 형제의 동화로 유명한 '브레멘의 악사'에 등장하는 네 마리의 동물 말, 개, 고양이, 닭의 동상이 있다. 리가에서 그 동상을 보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 왜 이런 동물들의 동상이 남아있는지 의아해 하겠지만, 이 리가를 건설한 알베르트가 브레멘의 대주교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그 동상 뒤로는 리가가 한자동맹의 중심지로 활동하던 당시, 리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유럽 주요도시들의 문양과 이름이 새겨진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리가의 현재 인구는 약 79만명이다. 우리나라 중소도시 수준에 불과한 것 같지만, 라트비아 전체 인구가 240만명 정도라는 사실을 참작하면 전 인구의 3분의 1이 이곳에 거주하는 셈이다. 이 아름답고 찬란한 역사의 도시를, 라트비아인들은 '라트비아의 창문'이라고 부른다. 이 창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만나는 이 '라트비아'라는 나라의 모습은 그 수도 리가와는 또 다르다.

덧붙이는 글 | 발트3국에 관한 필자의 홈페이지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발트3국에 관한 필자의 홈페이지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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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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