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언어, 라트갈레어

<발트3국 이야기> 라트비아 안의 발트 4국

등록 2001.10.22 05:43수정 2001.10.2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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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트갈레(Latgale)라는 라트비아의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쯤 유리스 치불스(Juris Cibuls)라는 라트갈레인을 친구의 소개를 통해 만나게 된 이후부터이다.

내가 유럽에서 사용되는 소수민족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을 알고 있는 한 친구를 통해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었고, 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친분을 쌓아나갔는데, 그의 괴상한 취미 덕분에 그 지방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소위 '글자익힘책'이라는 것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약 10년 정도 수집을 하여 현재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글자익힘책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대한 분량의 글자익힘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발트3국 전역에서 그의 수집품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자주 개최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글자익힘책'이란 '한 나라의 역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지리적 상황 등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라는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글자를 가르칠 때, 글자 ㄱ 옆에는 '김치'나 '강아지' 같은 우리에게 친숙한 상징적인 물건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베네주엘라에 있는 한 소수민족이 배우는 글자익힘책에는 동물을 잡는 '독침'과 옷대신 허리에 두르는 풀로 만든 치마 비슷한 것 등의 그림이 등장하는 것이다.

소련 시대에 라트비아에서 출판된 글자익힘책에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동화 바로 옆에 레닌의 이야기와 함께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다.

소련 공화국 내 한 민족이었던 코략(Koryak)에 글자익힘책엔 인사말이 나오지 않고, 닙크(Nivkh)족의 책에는 그들이 세는 물건의 형태에 따라 각자 다른 숫자를 사용하며, 신이나 교회에 관한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뉴기니에 있는 탕마(Tangma)족은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단지 두 가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에스키모족의 글자익힘책에는 나무라는 말이 당연히 나오지 않는다.

본인이 라트비아어를 배우기 시작한 당시. 외국인을 위한 라트비아어 교재는 아직 출판된 적이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구 소련 연방 시절에 나온 책으로 라트비아어를 배웠는데, 필자가 최초로 배운 문장은 '우리 아버지는 트랙터 운전사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공장 청소부입니다' 이런 것들이었다.

유리스 치불스 씨가 그런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가득 담겨 있는 글자익힘책을 수집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의 고향의 언어가 그런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많은 핍박과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유리스 치불스의 고향은 라트갈레(Latgale)의 발비(Balvi)라는 도시이다. 라트갈레는 라트비아의 지방이기에 먼저, '발트4국'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독자적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지역으로, 라트갈레어라는 고유한 언어가 존재한다.

1930년 1차 대전이 끝나고 라트비아와 함께 독립국을 이루고나서 카를리스 울마니스 (Karlis Ulmanis)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1934년까지 라트갈레어를 배울 수 있는 글자익힘책은 불과 20여 권이 출판되었고,그 후로 모든 라트갈레어 관계서적은 모두 불살라져 버리고 말았다.

1980년 규제가 느슨해진 때를 시작으로 유리스 치불스는 라트갈레어에 관한 언어입문서와 서적을 전문적으로 편찬하는 라트갈레 전문가가 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 라트갈레라는 지역은 역사 내내 리투아니아, 폴란드 연합국의 영토의 일부분으로 존재해 폴란드를 비롯한 슬라브민족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다. 라트비아의 종교는 주로 독일 루터교라고 하지만, 라트갈레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처럼 로마카톨릭신자가 대부분이다.

말한 바대로 라트비아어와는 다른 라트갈레어가 따로 존재한다. 얼마 전까지 이 언어는 단순한 라트비아어의 사투리로서 인식됐지만, 실제로 이 언어는 라트비아어와는 다른 식으로 발전을 이루었고, 리투아니아어와 고대 프러시아어와 연관성을 가진 또 다른 발트어의 일종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라트비아에는 그 두 개의 언어로 쓰여진 서로 다른 두개의 문학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셈인데 라트갈레 사람들의 말을 빌면 라트비아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나가면, 라트갈레어 사용자가 라트비아어 사용자보다 많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통계상 약 50만 명 정도가 라트갈레어권 사람인 것으로 집계되어있다.

중세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라트갈레 민족은 리가만에서 현재 벨라루시의 노보그로드(Novogrod), 폴로츠크(Polock)에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에 살고 있었고, '라트비아인(latviesi)'이라는 단어는 원래 라트갈레 지역에 살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며, 현재 쓰이는 라트비아 국기도 라트갈레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라트갈레 지방과 리투아니아의 전쟁이 있던 시절, 성 위에 올라가 리투아니아의 군인들과 맞서 싸우던 라트갈레의 대공작은 리투아니아인이 쏜 화살에 맞았고, 그의 병사들이 피를 흘리는 그를 바로 침대로 옮겼다. 그가 누웠던 침대보 가장자리는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에 물들어 자주색이 되어 있었고, 공작의 허리와 등이 있던 자리는 핏물이 들지 않아, 아직 하얗게 남아 있었다. 그 침대보의 모양이 현재 라트비아의 국기의 전신이라고 한다.

라트갈레의 역사는 리보니아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연합국에 복속되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역사의 흐름에 좌지우지 되어야 했고,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인 폴란드 3차 분할의 결과로 18세기부터 폴란드 동부 및 리투아니아와 함께 러시아의 일부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1863년은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러시아 학정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난 해이다. 그 반러시아 봉기의 실패 후, 그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리투아니아와 라트갈레에서는 자신들의 글자(로마알파벳)를 사용해 책을 출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자국어를 바탕으로 한 문화발전에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라트비아의 다른 지역과 에스토니아는 그런 금지사항이 없이 자신들의 언어를 바탕으로 한 문화발전을 이루어나간다.

제1차 대전이 끝난 후, 자신들의 지역에 국가를 만들 자유를 얻게 된 라트갈레인들은, 문화적으로는 리투아니아와 비슷하지만 라트갈레어가 리투아니아어보다는 라트비아어에 더 가깝고, 또 라트갈레가 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1917년 4월 레제크네(Rezekne)에서 열린 라트갈레 국민회의에서 '언어, 종교활동, 교육, 내정(內政), 농업 분야에서 자치권을 가진 상태에서 라트비아와 공동으로 공화국을 구성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 사항은 같은 해 에스토니아와의 국경도시 발카(Valka)에서 라트비아인들이 소집한 국민회의에서도 인정을 받아, 라트갈레는 타 발트국가들과 같이 자치권이 인정된 국가를 라트비아 안에 건설한다.

그러나 라트갈레인들의 자치성은 공공연히 부인되고, 1934년 5월 15일 초대 대통령 카를리스 울마니스의 쿠데타 이후, '라트갈레의 언어와 문학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라트갈레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라트갈레에서 청년시절을 보내고 실제로 라트갈레어로 창작활동을 하기도 한 라트비아인들이 추앙하는 작가 라이니스(Rainis)도 '그 당시 라트갈레인들에 대한 라트비아인들의 이유 없는 악의를 경험했다'고 고백한바 있다.

울마니스 대통령의 독재시대인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라트갈레어 사용은 철저히 억압되었고, 1945년 소련 침략 이후 더 악화되어 공공생활에서의 라트갈레어 사용은 전면 금지되었다.

라트갈레어 말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단체는 라트비아 괴뢰정부에 의해 조종 받은 '라트비아 학술원'으로, 모든 학교의 라트비아어와 라트비아 문학 수업시간에도 라트갈레어와 그 문학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가르치도록 조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라트갈레 출신 지식인들은 라트갈레어를 보존하고 비인간적인 라트갈레어의 탄압을 서방세계에 알리며 라트갈레어를 홍보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라트갈레 지식인들은 1917년의 국민회의에서 인정 받은 내용들을 유엔과 각국의 외무부장관들에게 보내어 소련 지배하에서의 라트갈레인들의 부당한 억압을 폭로하고, 스페인의 마드리드 라디오를 통해 라트갈레어로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으며, Voice of America나 바티칸 라디오를 통해 서방세계에 라트비아 정부의 억압을 알리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은 라트비아가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인 최근까지도 계속 되어왔고 한동안 라트비아에서 라트갈레의 이야기를 직접 꺼내는 것을 쉬쉬하며 꺼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라트갈레어는 노인들층과 정식으로 라트비아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쓰이고 있다.

라트갈레 지역으로는 다른 라트비아 지역들처럼 러시아들이 많이 이주하여, 라트갈레 지방의 제1의 도시 다우가우필스(Daugavpils)는 러시아인들이 거주자의 80% 이상이 되는 등 라트갈레 지역은 심각하게 러시아화 되고 말았다.

이 잊혀져 가는 언어인 라트갈레어도 라트비아의 제3의 공용어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라트비아 정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라트갈레 문화의 중심도시 레제크네(Rezekne)를 중심으로, 레제크네 대학을 비롯한 크고 작은 단체가 라트갈레어 복원과 교육을 위한 노력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레제크네에는 현재 라트갈레어로 방송을 하는 방송국이 운영 중이다.

라트비아에는 '클라우스(Klavs)'라는 이름이 많이 쓰인다. 그 클라우스라는 단어를 라트갈레 사람들은 '외양간'이라고 이해한다. 라트갈레어가 금지되어 오직 라트비아어로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 유리스는 그 '외양간'이라는 이름을 지독히도 싫어했다고 이야기했다.

유리스로부터 선물로 받은 라트갈레어 글자익힘책에는 레닌과 가가린의 그림대신 라트갈레 지방의 농촌풍경과 교회의 모습과 평화롭게 사는 할머니와 꼬마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힘들고 길었던 그 어려운 시절을 지내고 마침내 글자익힘책에 등장한 그 라트갈레의 평화로운 모습이, 영원히 라트갈레인들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남아 보전되기를 바래본다.

덧붙이는 글 | 라트갈레 및 발트3국에 관한 필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라트갈레 및 발트3국에 관한 필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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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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