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중 박찬호의 종목은 무엇?"

<발트3국 이야기> 에스토니아 국경의 '쪽지시험'

등록 2001.10.31 06:52수정 2001.11.0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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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국경에 '발카 (라트비아식으로 Valka, 에스토니아식으로 Valga)'라는 도시가 있다.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양국으로 양분된 도시라서 '발트의 베를린'으로 불리는 도시인데, 아이들이 옆마을에 놀러가거나 동네상점에 빵이 떨어져서 옆 나라 이웃동네 가게에 갈 때마다 시민들이 여권을 가지고 가야 하나 궁금하게 만드는 도시이다.

라트비아에서 에스토니아 쪽으로 차를 임대하거나 자가용으로 갈 경우 발카를 꼭 들러서 가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이 발카에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2년 전 이야기이다. 에스토니아에 사업상 출장을 떠나는 한국인들과 같이, 리투아니아에서 차를 임대하여 에스토니아까지 가는 길이었는데, 이 발카에서 라트비아 국경을 통과하여 에스토니아 국경에 이르렀다. 에스토니아 국경경찰들이 우리 일행의 여권을 모두 가져가서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 거 걸려도 너무 오래 걸린다 하고 차 안에 앉은 이들이 모두 짜증을 내고 있는데, 마침내 나타나는 국경경찰, 그리고는 두 명만 안으로 들어오란다. 그래서 필자와 마침 운전을 하고 있는 한국인 두 명이 국경검문소에 들어가자 취조실 같은데 두 명을 따로 앉히더니 잠시 후 무슨 시험지 같은 것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지에는 한국어로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그 문제지를 찬찬히 훑어본 다음 우리는 이마를 치며 깔깔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적혀 있던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다음 중 박찬호의 종목은 무엇입니까?
1. 축구 2. 야구 3. 농구 4. 탁구

다음 중 인순이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1. 가수 2, 정치인 3. 화가 4. 운동선수

다음 중 한국에 있는 산이 아닌 것은?
1. 설악산 2. 지리산 3. 토백산 4. 금강산

다음 중 한글을 창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1. 이순신 2. 유관순 3. 세종대왕 4. 광개토대왕


사정을 알고 보니 에스토니아에 위조된 한국여권으로 입국을 하는 중국인과 동남아인들이 많아 정말 한국인인가 가려보기 위해 준비된 깜짝시험이었고, 여권을 가져간 후 우리가 무료하게 기다렸던 시간은 국경수비대에서 어디론가 열심히 팩스를 날려서 시험문제를 준비한 시간이었던 것이었다.

한국인의 경우 여권을 분실하는 일이 비교적 잦고, 동유럽과 서유럽 대부분 어디든 여권 하나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국민들은 아시아에서는 한국인 외에는 많지 않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여권이 위조여권브로커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국경을 비교적 안전하게 넘는다는 것을 따져볼 때, 그리 엄청난 가격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시험문제가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서 한번 유출이 되었고, 그리고 그게 2년 전 일이니까 이제 새로운 문제가 출제되지 않을까 싶다. 이 발카라는 도시에 한국인이 들어가게 되면 그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스토니아에 한 발짝도 들어갈 수가 없고, 외교적 제재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다.

그렇게 국경을 넘어 에스토니아령 발카에 들어가면, 에스토니아에 들어온 것을 알리는 대형안내판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Eesti Vabariik' 에스토니아 공화국

에스토니아는 발트3국은 물론이고 중동부 전체에서도 상당히 '잘 나가는' 나라에 속한다. 유럽연합가입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들 중 1순위에 오르고 있는 이 나라는 통신, 경제분야에서는 다른 발트3국보다 월등히 앞서 진출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일단 '나르바(Narva)'나 '코흐틀라-옐베(Kohtla-Jarve)'처럼 소련시대에 건설된 공업지역들의 입지가 두드러지고,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과의 많은 교역으로 많은 가산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에스토니아와 핀란드는 정말 가깝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n)에서 핀란드 헬싱키까지는 뱃길로 불과 70 km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 두 도시를 수시로 잇는 페리는 항해시간도 한 시간 반 정도에 불과하다. 약 10년쯤 전 타이타닉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여객선 침몰사건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서울에서 평택 밖에 안되는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헬싱키와 탈린을 오가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있으며, 탈린 국제공항 일정에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탈린을 오가는 사람들 반수 이상이 헬싱키를 경유해서 올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비행기에서 내려 배로 갈아타게 하는 것은 항공사의 서비스 차원에서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탈린에서 헬싱키로 비행기를 타고 가본 사람에 말을 빌면, 헬싱키 공항을 이륙하자마자 바로 탈린이 보인다고 한다. 15분이 채 안 걸릴 것 같은 비행 중에도 승객들에게 샌드위치가 지급된다고 하니..... 역시 비싸고 볼 일이다.

그런 지리적 거리 외에도 에스토니아와 핀란드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공통점은 참으로 풍성하다. 언어적인 공통점은 기사에서 많이 거론한 바 있다. 핀란드어, 에스토니아어, 헝가리어는 인도유럽어족이 아닌 핀우그르족이라는 새로운 어군을 이루고 있고, 이웃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어와 비교해도 전혀 다른 종류의 언어이다.

리투아니아 사람과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만 써서 이야기를 해도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이 가능할지 몰라도, 에스토니아 사람들과는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에스토니아와 핀란드에서 불리는 국가(國歌)는 멜로디도 같다. 프리드리히 파츄스(Freidrich Pacius)라는 핀란드 작곡가가 작곡한 곡에 볼데마르 얀센(Voldemar Jannsen)이라는 에스토니아인이 가사를 붙인 노래가 에스토니아 국가로 불리고 있다.

일국의 대통령이 한 나라를 방문하면 각국의 국가를 번갈아 연주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에스토니아나 핀란드 대통령 중 한 명이 다른 한 나라를 방문하면 같은 노래가 두 번 반복되어 연주된다. 구스타프 에르네삭스(Gustav Ernesaks) 작곡의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라는 에스토니아 제2의 국가가 있기는 하다.

에스토니아의 여류민족시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현 에스토니아의 국가가 금지되었던 당시 제2의 국가로 불리었고 현재도 국가 행사에 즐겨 불리는 노래이지만,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후 현 국가인 '나의 조국, 나의 자랑과 기쁨'이 국가로 선정되었다.

특별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 국가의 작사가 볼데마르 얀센은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을 작사한 리디아 코이둘라의 아버지이다. 리디아 코이둘라가 에스토니아 민족시인으로서 추앙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에스토니아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운 선지자는 바로 그의 아버지이므로, 아무래도 인기도나 지명도에서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는 때문은 아닌지.

소련 시절에도 에스토니아인들은 가까운 핀란드에서 나오는 방송을 집에서 신청하는 일이 가능했다. '나의 조국, 나의 자랑과 기쁨'의 연주와 방송이 금지되었던 시절, 소련은 그 노래가 에스토니아인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그토록 노력을 했지만, 방송을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핀란드 텔레비전에서 연주되는 '에스토니아 국가' 때문에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핀란드 쪽에서 매일 울려나오던 그들의 국가는 에스토니아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북돋아준 귀중한 촉매였던 셈이다.

핀란드와의 상황이 그러한 만큼, 탈린에 가면 수도 없이 보이는 핀란드 패스트푸드 음식점과, 좀 과다할 만하게 보이는 에스토니아 경제의 핀란드 의존도와 그리고 탈린 시가지를 앞마당 같이 드나드는 핀란드인들이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작고 온순해 보이는 나라에도 과거 발트해를 누비며 이웃 강성한 나라들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던 악명 높은 해적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많이 모를 것이다.

에스토니아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Tere Tulemast!

덧붙이는 글 | 발트3국에 관한 필자의 정보방에 들러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발트3국에 관한 필자의 정보방에 들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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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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