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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22일 서울대 문리대 운동장에서 대한교원노조연합회(교원노조의 전신)가 결성됐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5월23일자 보도. |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이하 보상위, www.minjoo.go.kr)는 지난달 25일 "재야의 원로 고(故)계훈제 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보상위는 작년 12월 현행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1969년8월7일(3선개헌 발의일)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사망이나 부상에 대해서만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규정을 들어 유족들의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금 지급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보상위의 이런 결정은 50년대 이후 고인이 꾸준히 전개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돼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보상위는 뒤늦게 고인의 다른 활동을 들어 민주화운동 경력을 인정했으나 당초 결정이 현실을 도외시한 무리한 법 적용이었다는 비판을 자인하는 모양새가 됐다.
오마이뉴스는 계훈제 씨의 경우처럼 "3선 개헌 발의일 이전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민주화운동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한다.
'해방후 최초의 자주적 교원단체'인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이하 교원노조)는 결성 1년도 못돼 일어난 5.16 쿠데타로 인해 용공이적단체로 몰려 강제 해산되는 비운을 겪었고, 교원노조를 이끈 강기철 옹(78)은 7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역대 정권은 출옥 후에도 12년간 강 옹의 공민권을 박탈했고, 1987년에는 그의 전향서를 조작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행법에 안주하는 보상위는 이 같은 강 옹의 민주화 경력을 인정하지 않아 '민주화운동 경력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라는 출범 취지를 흐리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2차례에 걸쳐 5.16 쿠데타 세력의 철퇴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교원노조 사건의 실상을 조명하는 기사를 게재한다.(편집자 주)
"독재 권력의 하수인으로 굴욕적인 교사의 길을 걷던 우리 선배교사들이 그 질곡을 떨쳐버리고 교원노조의 기치를 든 1960년 4.19 교원노조의 역사, 그것은 우리교육사의 새 지평을 연 눈물겨운 투쟁이었고 쾌거였습니다."(전국교직원 노동조합 발기인 대회사, 1989년 5월14일)
"오늘 우리는 감격과 눈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1960년 4.19 교원노조 이후 38년만에,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된 지 10년만에 교원의 자주적 단결을 법으로 보장받게 된 것입니다."(전교조의 교원노조법안 통과 기자회견문, 1999년1월7일)
3년 전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전교조의 합법화는 10년간 1500여 명의 교사가 무더기로 해직당하는 수난 끝에 이뤄졌다. 출범과 합법화라는 역사적인 순간들을 기념하는 전교조의 문건 속에서 전교조는 '4.19 교원노조'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1960년 4.19 혁명의 열기를 타고 출범해 '4.19 교원노조'로 불린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이하 교원노조). 그러나 1500여 명의 해직교사를 내며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강제 해산된 '한국 최초의 자주적 교원단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많지 않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용공세력으로 몰린 교원노조의 명예회복이 해산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원노조의 수석부위원장 겸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았던 강기철 옹은 작년 11월 보상위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보상위, www.minjoo.go.kr)'로부터 짤막한 통지문을 전달받았다.
보상위는 5.16 이후 7년간 복역해야 했던 강 옹에게 "교원노조 사건과 관련, 투옥된 것은 3선 개헌 발의일(69년8월7일) 이전의 일이므로 보상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고 결정했다. 강 옹은 재심 청구를 했으나 지난 2월27일 다시 기각됐다.
20일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강 옹은 보상위의 무원칙한 행정 처리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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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 수석부위원장 겸 위원장 직무대행을 지낸 강기철 옹. ⓒ 오마이뉴스 손병관 |
"평생 민주화운동에 몸바쳐온 계훈제 씨에 대해서도 기각 처분을 내렸다가 언론에서 문제를 삼으니까 며칠만에 슬그머니 명예회복을 결정내린 것 자체가 보상위가 원칙 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의 명예회복은 사사로운 개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앞으로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야 할 교원노조 용공조작 사건의 재심을 비롯한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입니다. 재판도 하기 전에 파면된 1500명의 교사들과 그 가족 6천여 명의 명예가 걸려 있습니다."
출범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강제 해산된 교원노조는 이승만 집권중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교육계에 대한 일선 교사들의 자성이 출범의 밑거름이 됐다.
"교육감과 교장들이 나서서 교사들을 자유당 당원으로 가입시켰죠. 교실 환경 미화를 한다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의 사진을 교실에 장식하고, 그것으로 교사의 근무 성적을 평가했습니다. '이승만 찬양 글짓기 대회'가 시도 때도 없이 열렸고, 교사들이 가정 방문을 하면 학부모들의 정치 성향을 파악해 보고하기 급급했죠. 3.15 부정선거를 하기 전에는 교장, 교감들이 교사들의 사직서를 미리 받아뒀습니다. 부정선거에 협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면직시키겠다는 협박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3.15 선거를 불과 2주일 앞둔 60년 2월28일 일요일 대구에서는 일선 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장면 당시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를 듣는 것조차 막기 위해 '일요수업'을 강행했다.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가 항의시위를 하려고 할 때, 교사들은 이들을 막아서는 '정권의 시다바리'로 전락했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하의 부정과 불의가 백일하에 드러나자 교단에도 자성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그해 5월3일 대구지역교원노조결성위원회의 교사 이목(80. 이후 교원노조 사무국장) 씨가 작성한 격문 광고는 "'선생님, 정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하고 정열에 불타던 그 눈동자, '비겁합니다, 선생님!'하고 외치던 그들의 울부짖음! 어찌 여기에 양심의 가책과 자괴가 없을 소냐!"라고 적고 있다.
"교사들이 교원노조를 만들 때는 노조라는 생각보다는 자율적인 교원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습니다. 당시 대한교련(현 한국교총)은 누가 봐도 정권과 유착한 어용단체였어요. 결국 노조가 아니면 교원으로서의 권리 향상과 교육 개혁을 힘있게 펼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마침내 7월17일 의사회관에서 2만여 명의 교사가 가입한 가운데 교원노조가 결성됐다. 강 옹은 이때 수석부위원장으로 지명됐고, 계훈제 씨도 서울지역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교원노조는 한때 전국 조합원 수가 4만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 교원수가 10만 명이 안된 상황에서 이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가 발간한 '교총 40년사'는 "교원노조로부터 어용 단체로 몰린 교총(당시 대한교련)은 일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8만2천명이었던 교총 회원은 4.19 혁명 이후 5만여 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고 적혀 있어 교원노조의 급격한 세 확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교원노조 결성 움직임에 대해 주무부처 차관들이 "교원노조를 잘 육성해야겠다"(이항녕 문교차관), "교원노조 결성을 권장하지도 막지도 않겠다"(김학묵 보사차관)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냈지만, 이병도 문교장관이 "교원노조를 불허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 허정 과도정부의 대응도 강온양면으로 갈렸다. 정부와 교원노조의 신경전은 장면 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계속됐다.
"이항녕 차관이 나중에 '미국 정부 관계자가 교원노조는 시기 상조다라는 말을 하자 분위기가 돌아섰다'고 하더군요. 교원노조가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데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미국의 미온적인 입장 표명을 당시 보수정객들이 적극적인 반대의 빌미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움직임이 활발했던 곳은 대구 경북 등 영남지역이었다. 그해 8월20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열린 '탄압반대 교조 전국총궐기대회'를 취재한 한국일보 특파원은 "전국 각도 대표와 대구 부산시내 교사 및 일반시민 등 5천여 명이 모였다...(중략)...서울에서 참가한 신태섭 대한변협 회장은 '변협은 이미 교원노조의 합법을 주장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지원할 것이다. 교조의 합법성은 공무원법이나 노동법에 구애됨이 없이 헌법에서 보장받고 있는 기본권리이다'라고 천명하여 행정부의 부당한 간섭을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교원노조가 불법이다"라는 명시적 법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 일각에서 교원노조를 불법화하는 취지의 법개정이 추진되자 9월29일 당시 민주당 선전부장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교원노조 불법화에 찬동한 바 없다"며 교원노조를 거들기도 했다.
1961년 4월말 교원노조 설립에 부정적이었던 문교부도 실체를 인정하기에 이르러 교원노조의 합법화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강 옹을 비롯, 이목, 신동영, 이종석 등 교원노조의 핵심간부들이 일제히 체포됐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노조 간부들이 극심한 고문 속에 간첩 내지 용공 혐의자로 조작되는 동안 문희석 문교부 장관은 "교원노조가 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던 음모가 발각됐다"(6월8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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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자료들을 들춰보고 있는 강기철 옹. ⓒ 오마이뉴스 손병관 |
"당시 교원노조 강령에는 '우리는 4월혁명 정신을 받들어 투철한 반공이념하에 민주학원 건설의 선봉이 될 것을 기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어요.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IFFTU)에도 가입한 조직을 용공단체로 모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조작이었죠."
당시 경기도연합회 위원장을 맡았던 이동걸 씨는 출옥 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억울함과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한 이 위원장은 쿠데타 세력에게 고초를 당하기 전 인천 경기수산고 훈육주임교사로 일하고 있던, 전향적인 실향민이었다.
"박정희 일당이 우리 동지들을 고문할 때 특히 고생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북 출신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대형간첩 사건을 만들려고 하다보니 이북 출신 교사들이 표적이 됐죠. 이동걸 동지도 '남한사회 공산화의 사명을 띄고 교조에 가입했다'는 고백을 얻어내려는 군부독재의 희생양이 된 것이죠."
관련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에도 별다른 혐의점이 나오지 않자 쿠데타 세력은 당황했다. 그러나 이미 1500여 명의 교사를 해직시킨 상황에서 '작품'이 만들어져야 했다. 혁명검찰은 "피고인들이 교원노조 간부로서 괴뢰집단(북한)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1)부산 대전 대구에서 열린 교원노조 대회에 참가하여 2대법(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 반대강연을 열고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2) 서울대 민통련에서 주장한 남북학생회담안을 환영한다고 발표하여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 고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 옹은 이 같은 검찰의 논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2대법은 누가 봐도 4.19 정신을 훼손하는 악법이어서 각계 단체는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반대여론이 비등했습니다. 검찰은 신동영 씨가 개인적으로 남북학생회담 지지 결의안 초안을 작성한 것을 가지고 '교원노조가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했다'고 주장하지만, 지도부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신씨도 초안을 폐기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쿠데타 세력이 혁명 직후 잡아들인 반체제 인사들을 처벌하기 위해 소급법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61년 6월22일 제정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특수반국가행위)는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 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서 반국가 단체(북한)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를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본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3년6개월까지 소급하여 적용한다"고 부칙을 덧붙였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민정 이양'이 된 후 제정된 3공 헌법 부칙에도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의 효력은 지속되며 이에 대하여 이의를 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특정인이나 단체를 처벌하기 위해 무리하게 소급법을 만든 후 피해자들이 이에 대해 항소할 최소한의 여지조차 막아버린 것이다.
1968년 4월24일 강 옹은 7년만에 석방됐다. 교원 노조를 결성했던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자신도 정치정화법 대상으로 6년간 묶여있어야 했다. 강 옹은 출옥 후에도 3선 개헌 반대운동(1969), 민주수호국민협의회 활동(1977)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민주화 투쟁에 대한 정권의 화답은 사회안전법의 적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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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강 옹이 관계기관으로부터 입수한 '자신의 전향서'의 필적(위)과 기자 앞에서 직접 쓴 필적(아래). 강 옹은 "내 필적과 전향서 필적은 분명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
강 옹은 1977년5월부터 12년간 보호관찰의 대상이 됐다. 거주 제한과 해외여행 금지 등 공민권도 자연히 박탈되고 사회활동도 제한됐다. 연좌제의 적용으로 아들의 학사장교 시험 합격도 취소됐다. 복역기간 동안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 사회안전법 적용 사유였는데, 1987년 7월 돌연 강 옹에 대한 보안처분이 면제됐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민주화 바람이 불자 정권에서도 당황했죠. 내가 쓰지도 않은 전향서와 복역행적서가 작성됐고, 형사가 동장을 찾아와 '강씨의 신원보증을 서라'고 요구했어요. 쓸 일도 없었지만, 쓰지도 않은 전향서를 멋대로 작성한 것에는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다. '5.16 주체세력' 김종필이 집권당 대표를 맡고 있었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5.16은 쿠데타'라고 규정 내린 것을 보고 강 옹은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강 옹은 1994년 12월 '5.16 진상 규명 특별조사위원회’구성을 청원했다. 여야 의원 35명이 청원의견서에 서명했다. 지금은 여야로 갈려 있지만, 이 의견서에는 한광옥 민주당 대표와 권노갑 전 의원을 비롯, 김상현, 김영배, 김옥두, 김원기, 박지원, 이윤수, 이해찬, 이협, 임채정, 장영달, 정대철, 조세형(이상 민주당), 김원웅, 이경재, 이부영, 홍사덕(이상 한나라당) 등 유력 정치인들의 서명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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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작성된 '5.16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 국회청원소개서에 담긴 여야 의원들의 서명. 위로부터 한광옥, 홍사덕, 권노갑, 김원기 의원의 이름이 보인다. |
국회 청원에도 불구, 특별조사위원회는 구성되지 못했다.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한 김영삼 정권 하에서 전교조의 '하늘같은 선배' 격인 교원노조 사건의 진상 규명은 애당초 한계를 안고 있었다. 99년 전교조는 합법화됐지만, 교원노조에 씌여진 용공단체의 굴레는 벗겨지지 않았다.
2000년 민주화관련자법이 제정됐지만, 강 옹과 교원노조의 명예회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재야 단체 관계자들은 민주화관련자법 자체가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사이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민족민주열사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이하 범국민추진위)'의 일원으로 당시 실무작업에 참여했던 손종필 유가협 사무국장은 "적용시기에 논란은 있었지만, 범국민추진위는 '45년 8.15 해방 이후',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는 '전태일 분신' 또는 '5.16 쿠데타' 이후 수난을 겪은 민주투사들의 공적을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문제는 5.16 쿠데타를 주도한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공동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화관련자법의 적용 시기를 5.16 직후까지로 늘려 잡을 수가 없었던 것. 당시 국민회의로서는 5.16 직후까지로 법 적용시기를 늘려 잡는 것은 'DJP 공조 파기'를 각오해야할 미묘한 사안이었다.
'민주화운동 정신 계승 국민연대(www.krdemo.org)'의 이은경 사무처장도 "자민련이 격렬히 반대하는 상황에서 결국 3선 개헌 발의일(69년8월7일)이라는 어정쩡한 적용시기가 결정됐다. 한나라당 역시 적용시기를 72년10월17일(10월유신) 이후로 해야 한다고 주장, 자민련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전했다.
결국 정부 여당이 정권 수립에 큰 기여를 한 김종필 총재의 눈치를 보다보니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초기에 있었던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은 정당한 자리매김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전교조의 이경희 대변인은 "교원노조는 4.19 혁명후의 민주화 씨앗을 뿌린 시기에 출범한 자주적인 교원단체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법 적용 시기에 연연, 교원노조 관계자들의 입장을 묵살하는 것은 과거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출범 목적에서 빗나간 것이다. 법 적용상의 문제가 있다면 법 개정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강 옹은 94년12월 국회청원 소개서에 지지 서명을 한 후 아무런 대답이 없는 여야의 실세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역사 바로세우기 한다고 하더니 12.12와 5.18만 해결하고는 5.16은 유야무야 넘어가네요.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까지 지어주겠다'고 하는데, 박정희 좋아하는 인간들끼리 돈을 모아서 지어야지. 왜 애꿎은 국민 세금을 거기에 쏟아 부어요? 그래도 김종필 같은 사람들이 정치권에서 갈수록 힘을 잃고 있으니 언젠가는 우리의 노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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