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한 문사'의 폭력적 오독을 경계한다

<반론> 김명인의 글을 읽고 문부식을 만나다

등록 2002.07.15 00:45수정 2002.07.16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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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전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김명인 기자의 글을 읽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반론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기사에서 피력된 '심약한 문사'의 견해에 특별히 다른 의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김명인 선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히고 다치고 죽어갈 때 짱돌 한 번 변변히 들어보지 못한 처지에, 그 험한 시절을 감당해 온 복잡한 속내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저울질하는 것은 무척이나 주제넘은 짓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반론'을 펴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너무나 다른 내용을 행간에 전제한 채 펼쳐지는 그의 '악의적'인 글쓰기에 경악을 했고, "사실이 이러이러하다 해도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지"를 정중히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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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7월 12일자에 실린 문부식 씨 인터뷰 기사.

그래서 우선 나는 내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재차 확인하고 내친 김에 그의 현재 심경을 헤아리기 위해 토요일 늦은 밤 문부식 주간을 만났다.

조선일보 식의 어법을 빌자면, 문부식 주간의 조선일보 인터뷰로 인해 논란이 일고 있는 상태에서 '독점 인터뷰'를 한 셈이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문부식 주간이 몸담고 있는 삼인 출판사에서 바로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었던 처지에 짐짓 객관적인 취재인 척 글을 꾸미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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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비가 쏟아지는 밤에 내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나의 시선에서 써볼 참이다. 그것이 얼마나 객관적으로 타당한 시선인지는 글을 읽는 독자들이 판단해주기 바란다.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서두에서 김명인 기자의 글을 '악의적'이라고까지 지목했던 까닭을 해명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터이므로 문부식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독자들은 지루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시기 바란다.

문부식의 '성찰'은 과연 "때늦은 대오각성"인가

문제의 기사만 읽어 보면 마치 문부식 주간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지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반성'하면서("아무래도 조금 늦었군요", "때늦은 대오각성") 거기에 애꿎은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양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자신이 저지른, 우리가 오래도록 '부미방(釜美放)'이라 부르던 그 사건에 대해서도 반성을 하고 그때의 희생자에게 합당한 사죄를 한" 것이 7월 12일자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서라고 판단한 것은 전적으로 김명인 기자의 착각이다. 문부식은 그 사건 당시부터 줄곧 그렇게 해 왔으며, 아마도 앞으로도 평생 짐으로 지고 살 것이다.

'악의적'이게도 김명인 기자는 조선일보의 닳아빠진 정치적 수사를 마치 문부식 자신의 말인 양 오해되게끔 글재주를 부렸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문부식은 자신과 혹은 자신이 저지른 사건을 추호라도 '반미자주화운동의 선구'라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마치 내가 그를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나 역시도 김명인 기자처럼 그를 '전직 혁명가'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대비평 1999년 겨울호에 실린 그의 글을 읽고 내가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내게 문부식이라는 개인에 대한 재발견(그는 '(전직) 혁명가'가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시인'일 뿐이라는)만이 아니라 198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재발견이었고, 나에게 이런 깨달음의 계기를 준 그 글에 아직까지도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김명인 기자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글을 읽고도 "이른바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한 선생보다는 20년은 더 선배인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무척이나 의심스럽다. 적어도 "아직 한번도 혁명가가 되어보지 못한 심약한 문사"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조금 늦었다"는 그의 판단이 전적인 오해였음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으리라고 감히 짐작한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는 문부식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악의적인 글을 쓴 것일까. 아마도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그가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의대 사건'에 대한 "조금 다른 견해"에서 비롯된 불편함이 아닌가 싶은데, 아래에서 다시 자세히 쓰겠지만, 이것 역시 김명인 기자의 전적인 오해의 소치이다.

"달리 이야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문부식이 도대체 '동의대 사건'에 관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는 (조선일보가 '단독 입수'했다는) 그의 글의 첫머리가 고스란히 김명인 기자가 언급한 그대로 '부미방'과 '동의대' 사건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에 관해 시시콜콜 언급하는 것은 서두에서 밝혔듯 내 주제를 넘어서는 일이기에 역시 나중에 문제의 글을 읽어 보시고 다시 한 번 판단해 주십사 하는 권유에 그치려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문부식이 조선일보라는 지면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는 사실에 대한 불편함일 것이다. 그런데 대단히 죄송하게도 '신문 감시'를 하시면서 미처 발견을 못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물론 조선일보의 취재에 응한 것이 사실이므로 전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면적인' 사실일 뿐이다.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시다면, 지난 7월 6일치 한겨레를 찾아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한겨레의 기사에서 도대체 문부식이라는 사람이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무슨 얘기를 했다는 것인지를 읽어내 보시기 바란다. 이 기사를 읽고 문부식의 발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아마도 천재일 것이다.

눈치빠른 분들은 이 대목쯤에서 김명인 기자가 어떤 잘못된 전제를 했는지를 짐작하겠지만, 좀더 상세하게 '내가 이미 알고 있던'(그리고 문부식 주간을 통해 재차 확인한) 사실을 정리해 보겠다.

역사문제연구소 토론회의 보충 취재였을 뿐

지난 6월 28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자그마한 토론회가 열렸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 80년대를 다시 생각함'을 주제로 문부식 주간이 발표하고, 조현연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 연구교수, 한상구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 토론자로 나섰다.

이 토론회는 문부식 주간의 에세이집이 6월중에는 발간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그 책의 내용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에서 오래 전부터 약속되었던 자리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로 문제의 '동의대 사건'을 언급한 원고를 새로 쓰느라 책의 발간이 늦어지게 되었고, 문 주간은 토론회를 연기해 줄 것을 주최측에 완곡하게 요청했으나 어차피 책에 실릴 10편의 에세이 가운데 8편이 기발표된 내용이기 때문에 책으로 묶이지 않았더라도 토론에는 지장이 없으리라는 판단에 따라 예정대로 강행되었다. 미발표 원고 2편은 초고 상태로 토론자들에게 현장에서 전달되었다.(취재 기자에게 전달된 것은 김기철 기자가 유일한 만큼 '단독 입수'라는 수사가 거짓은 아니나, 마치 아무도 못 본 원고를 조선일보에만 특별히 건네준 것인 양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이제 "그 성찰의 내용에도 또 그 형식에도 동의할 수는 없"으시다는 김명인 기자에게 질문하겠다. 그 '성찰의 내용'이 되는 10편의 글 중 몇 편이나 읽어 보셨는지, 조선일보에 20매 가량의 기사로 보도된 내용만을 가지고 지난 몇 년 간 여러 지면을 통해 꾸준히 계속되어 온 두툼한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되는 그 성찰의 내용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감식안을 가지고 계시는지. 또 글쟁이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묶어 펴내고 나아가 심지어 그것을 권위 있는 학술 단체에서 주최하는 공개적인 토론의 장에 붙여 평가를 받는 '성찰의 형식'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물론 김명인 기자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조선일보라는 지면일 것이다. 공개된 토론회에서의 발언 내용이 어떻게 조선일보에 인터뷰로 기사화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경위는 이렇다.

조선일보 김기철 기자는 이 토론회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발표자인 문부식 주간에게 보충 취재를 요청했지만, 책이 발간된 뒤에 그에 관해 이야기하자는 취지로 거절을 했다. 책이 나온 뒤라면 공개 발간된 책이 조선일보든, 한겨레든, 오마이뉴스든 매체 나름의 시각에 따라 소개되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역시 현장을 취재한 한겨레에 토론회 관련 기사가 나갔고, 함께 취재를 하고도 '낙종'을 한 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조선일보에서도 취재를 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기사화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이런 경우에 보충 취재에 응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것이다. 다만 한겨레의 기사가 발언 내용을 심각하게 일그러뜨린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상황에서라면, 별도의 사안도 아니고 단지 이미 발언한 내용을 정확히 재확인하고자 하는 보충 취재 요청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왜 하필 조선일보여야 했는가이겠지만, 조선일보에만 기사가 나가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해서 현장 취재를 하지도 않은 다른 매체의 기자를 책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러 부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야말로 새삼스럽게 "때늦은 대오각성"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대단한 정치적 선언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동안 써온 글들을 공개 토론에 붙인 것뿐인데 말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한 것이 잘못이라 해도, 이것이 마치 일부러 조선일보라는 지면을 선택해서 '새삼스러운 반성'의 뜻을 발표한 양 매도되어도 좋을 만큼 심각한 잘못인지 일찍이 20년 전부터 '우리 안의 폭력'에 눈을 뜨셨다는 김명인 '선배'에게 질문드리고 싶다.

"지난 날의 행동에 대한 '자기 부정'이 아니다"

11일 늦은 오후 조선일보의 기사가 인터넷에 돌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2일 밤 조선일보의 사설을 접하고는 한편으로는 조선일보의 눈부신(?) 기동력에 전율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오마이뉴스에 김명인 기자의 기사가 올라왔고, 그것을 보자마자 문부식 주간과 연락을 시도했다. 통화가 된 것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였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무척 무거웠고 지쳐 있는 기색이었다. 그는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넘겨서 약속 장소에 나왔는데, 아마도 동의대 사건 관련자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어느 민가협 어머니의 전화를 받느라 늦었다며, 자신이 그분들께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게 된 것을 마음 아파했다.

우선 조선일보에 인터뷰를 하게 된 경위의 사실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그 뒤에 일어난 파장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나름대로 상황의 불가피성이 있었지만, 경위야 어찌 되었든 조선일보와 단독으로 인터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경솔했다는 대답이다. 특히나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의 발언이 진의와는 다르게 조선일보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면, 그것에 관해서만큼은 빌미를 준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적어도 책만 제때 나올 수 있었다면 조선일보가 사후에 그 내용을 어떻게 이용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근거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이 발간 일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 기사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신의 발언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했고 특별히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은 없으며, 김기철 기자에게는 별다른 유감이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다만 일련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10편의 에세이 중에 1편의 내용만이 그 본래의 맥락을 떠나서 부각되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한겨레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역사문제연구소의 토론회에서 가장 격렬한 토론이 있었던 부분이었으므로 그 자체로 문제 삼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인터뷰 기사의 제목 "민주화운동 인정 납득할 수 없다" 역시도, 오해의 소지는 분명히 있고 기사를 쓴 기자도 개인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해 오기도 했지만, 자신의 진의는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동의대 사건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거나 그것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단정적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너무나 성급하게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한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사설로 이야기가 옮아갔을 때, 침통하게 말을 아끼던 그의 말문이 틔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백'이나 '참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말 자체의 의미야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들, '자기 부정'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곤 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다. 나는 결코 내가 살아온 과거에 대해 '자기 부정'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럴 의사도 전혀 없다."

조선일보의 사설을 쓴 사람은 자신들이 '단독 입수'했다는 그의 글들을 제대로 읽어나 봤는지 모르겠다. 내가 읽어온 바로는, 문부식은 '자기 부정'은커녕 오히려 그 20년 세월의 기억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며 그 의미를 묻고 또 묻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치열한 자기 성찰'을 해온 사람에게 '참회'니 '고백'이니 하는 이미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나 그가 유감스러워하는 대목은, '우리가 취한 방법이 최선이었는지를 물었다'는 자신의 말을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를 물었다'는 식으로 윤색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시켰다는 점이다. 이 사설만 본다면 마치 자신이 한 행동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의심했다는 의미로 오해하겠지만, 자신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은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 그것이 최선이었는지'였고, 우리가 무오류의 존재가 아닌 이상 이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한 일이지만, 그 질문들의 '치열함' 때문에 그는 언제나 글을 고치고 또 고치느라 마감을 넘기기가 일쑤이다. 이번에도 아마 그야말로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마치 남의 일처럼 멀찍이 관조하면서" 손쉽게 쓸 수 있었다면, 책이 때에 맞춰 나오지 못하는 불상사도 없었을 것이고, 혹시 채 다듬지 못한 거친 글로 인해 더 심한 비난에 직면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조선일보라는 덫은 피해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책이 발간되면 그 내용을 조선일보가 멋대로 해석하여 이용하리라는 정도는 충분히 각오하고 있던 일이지만, 11일 오전에 인터뷰를 하고 12일자에 대서특필하고 13일자에 사설을 싣는 식으로 급속도로 상황을 에스컬레이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저 발간될 책에 관한 소개 기사로 한겨레와 비슷한 크기로 문화면에 실리는 정도가 아닐까 짐작했다는 것이 이미 깊이 사과의 뜻을 밝힌 '경솔함'에 대한 궁색한 변명만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조선일보의 제작 시스템에 대해 적어도 '평균 이상'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나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국가가 우리를 호명하기 전에도 우리는 민주화운동이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동의대 사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지만, 그것을 일일이 여기에 옮기지는 않겠다. 차라리 책이 나온 뒤에 그의 글을 직접 읽어 보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가 있다면 그때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비판하라고 말하고 싶다. 인터뷰에 인용된 말들이 분명 왜곡되지 않은 그의 말이라 하더라도 단편적인 말 몇 조각만으로 그가 제기하려고 했던 문제의 지점을 넘겨짚기에는 그가 그간 써온 글들의 결이 너무나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 앞에서 자신의 책에 실릴 내용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지, 동의대 사건에 관한 단편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무슨 이야기 끝엔가 "국가가 우리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도 우리 가슴 안에서 그것은 민주화운동이었다. 보상 신청을 할 것인가를 놓고 망설일 때 구로구청에서 떨어져 휠체어를 타게 된 양원태씨가 보상 신청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결심을 굳혔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생각을 했다. 막말로 나는 다친 데는 없지 않은가. 징역도 다 살지 않았는가. 아직도 징역을 사는 사람들이 있고, 수배에 쫓기는 사람이 있고, 다친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어 '의문사'라고 불리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내버려둔 채로, (역설적으로 '사회적 충격이 컸던 알려진 사건'이라는 덕에) 국가가 호명하는 '민주화운동'으로 먼저 인정받는 것은 순서 위반이다. 13년을 기다렸다면 더 기다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를 질문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던 것은 (혹시 그의 진의를 내가 다시 한 번 왜곡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는 하지만) 기록해 두고 싶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주제넘지만 한 마디를 거들었는데, 그에 대한 그의 대답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뚜렷한 정치적 자의식을 가지고 운동을 했던 세대의 시각에서, 이미 운동이 대중화되어 정치적 자의식이 채 여물기도 전에 운동에 가담할 수 있었던 세대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자신의 정치적 자의식에 비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짊어졌던 이들에게 도덕적 부담까지 지운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닌가."를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내가 정작 받고 싶었던 비판은 바로 이런 비판이다. 생각 같아서는 다시 글을 손보고 싶지만, 경위야 어쨌건 이미 논란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반칙인 것 같다. 나중에 그에 관해 다시 글을 쓰더라도 일단은 그대로 발표하고 그 비판까지를 포함해서 겸허하게 비판을 받으려 한다."

문부식은 이런 사람이다. 적어도 주접스럽게 조선일보에 쫓아가서 '나 이제 지난 일을 반성했소'라고 제 입으로 떠들고 다닐 그런 경박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마지막으로 질문하고 싶다. 조선일보가 그의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면, 설령 그것이 그의 경솔함에 기인한 것이라 해도 더 많은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조선일보인가, 문부식인가. 김명인 기자가 지적했듯이 문부식의 '성찰'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 운동이 그 험한 세월을 견디며 일궈낸 성과라면, 그의 값진 '성찰'을 조선일보가 도둑질해다가 정치적으로 개칠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 '성찰'을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것은 조선일보에 더렵혀진 것이므로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내팽개치면서 무기력하게 우리가 만들어낸 것을 조선일보가 마음대로 요리해 먹도록 통째로 헌납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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