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 '술탄 메메드 2세'와 톱카프궁전

<유라시아여행기> 터키 이스탄불 (2)

등록 2003.05.21 03:03수정 2003.05.2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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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서양 기독교 문명의 방파제 노릇을 해 온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함락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기까지는 단 5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스물한살 약관의 한 사내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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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왕 '술탄 메메드 2세'

정복자 '술탄 메메드 2세(Mehmed II)'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7대 술탄이었던 그는 이전의 술탄들이 이루지 못했던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도전하여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오스만쿠르크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비록 쇠퇴하긴 했지만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총 길이 21km에 달하는 삼중 성벽은 웬만한 포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 역대 투르크왕조의 술탄들 역시 콘스탄티노플의 높고 견고한 성벽과 수비에 밀려 매번 물러나야했다.

하지만 21세의 젊은 군주 메메드 2세는 달랐다. 그는 병력을 직속부대인 비정규군단, 정규군단, 그리고 투르크제국 최강의 육군부대라는 예니체리 군단으로 나누었고, 그 외에 각지에서 지원하러 온 파샤들의 군대로 편성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진군하였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해양국가인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선전으로 힘을 쓰지 못했다. 바다에서의 열세를 만회한 것은 육지에서의 전투였다. 우르반의 거포라 불리우는 신병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대포전문가가 제작한 이 대포는 포탄의 무게만 600kg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크기와 무게만큼이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신병기는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며 성의 수비대를 무력화시켰다. 곧이어 투입된 예니체니 군단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치열했던 공방전은 단 53일만에 끝이 났다. 천년 역사의 비잔틴제국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순간이자 서방 기독교세계에 대한 동방 이슬람세력의 승리였던 것이다.

술탄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외적으로는 외환의 씨를 제거한 것이며, 내적으로는 터키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켜 술탄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외적으로 안정된 강력한 관료제 국가체제를 정립한 그는 이후 아나톨리아와 발칸 방면의 정복활동을 속행하였고, 세르비아를 병합하고 보스니아를 복속시킴으로써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며, 아드리아 지배를 둘러싸고 베네치아와 싸웠다. 또 제노바를 흑해로부터 축출하고 크림한국과 카라만후국을 병합하는 등 지속적인 정복활동을 통해 오스만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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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궁전 입구 ⓒ 홍경선

이스탄불에서 술탄 메메드 2세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단연 '톱카프궁전(Topkapi Palace)'이라 할 수 있다. TOP(대포) KAP(문) SARAYI(궁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오스만제국 역대 25명의 술탄들이 거처했던 궁전이자 행정 중심지, 최고의 군사적 요새였다. 15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약 400여년간 오스만 제국의 역사와 함께 했던 '톱카프궁전'은 1475년 술탄 메메드 2세의 명에 의해 처음 건설되어 그 후 4세기 동안 여러 술탄들에 의해 확장되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높고 평평한 곳에 위치하며 1400미터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궁전은 전체 면적이 약 70만 평방미터에 달하며 크기 면에서는 바티칸의 두 배, 모나코의 절반에 달한다. 한때 술탄과 그 가족 외에도 5천명이 넘는 시중들과 군사, 관료들이 거주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와 번영을 자랑하던 이곳은 그 규모와 크기로 볼 때 중국의 자금성과 견줄만 하다.

성 소피아 성당의 뒤쪽으로 쭉 뻗은 길을 따라 5분 정도 걷다보면 정문에 도달한다. 이 문을 통해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매표소와 함께 넓고 긴 '제1정원'이 나온다. 짙은 수목으로 무성한 이 정원의 오른쪽에는 부대 막사와 주차장, 궁전병원 등이 있고 왼쪽에는 성 이레인 교회가 있다. 정원을 가로질러 매표소를 지나면 궁전의 2번째 정문인 예절의 문이 나온다. 오스만제국 시대에 술탄과 술탄의 모후를 제외한 나머지 재상들은 모두 내려 경의를 표한 후 지나가야 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을 통과하면 본격적인 궁전나들이가 시작된다. 1478년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해 건축된 이 문은 양쪽에 두 개의 첨탑이 세워져 있는데 꽤나 인상적이다. 마치 궁전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압도하듯 하늘 높이 뻗어있다. 특히 왼쪽의 탑은 오스만제국 시대에 범죄를 저지른 고위 관리들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문을 통과하면 플라타너스와 푸른 잔디가 멋들어지게 조성된 '제2정원'이 펼쳐진다. 언뜻 보기에 공원 같은 이곳은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많은 동물들을 사육했다고 한다. 정원의 입구에는 궁전의 모형이 만들어져 있는데 벽에 붙어 있는 지도는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 했다. 16세기 세게 최고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던 오스만제국은 1281년 성립된 이후 1354년 유럽에 진출하여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를 차지하였고 에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를 점령하였으며,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와 같은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듯 톱카프궁전의 모습은 장대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넓이 130m, 길이 160m에 달하는 이 정원의 오른편에는 부엌이 있다. 창문으로 보이는 부엌안은 그리 낯설지 않은 우리네 아궁이와 비슷한 기구를 비롯하여 갖가지 요리기구들로 가득했다. 매일같이 궁전에 거주했던 5000여명의 하루 세끼 15000명분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으니,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부엌 건물의 한쪽에는 세계적인 도자기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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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1 ⓒ 홍경선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도자기 전시관인 이곳에는 중국 원, 명, 청나라 도자기는 물론 일본, 유럽의 도자기들이 일만이천여점이나 전시되어 있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진 이들 도자기들이 보물 수집용이 아니라 실제로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하긴 부엌에서 만들어진 하루 만 오천 명분의 식사를 떠올려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처럼 동양의 도자기들이 식기로 쓰였던 이유는 음식에 독을 타면 자기의 색깔이 변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궁중이라는 공간적 특성상 당시 술탄들은 항상 암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제 2정원 왼쪽의 의사당 뒤쪽 건물에는 오스만제국과 유럽의 병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끝이 유난히 구부러진 칼과 거대한 활, 총, 기병들의 간편한 갑옷 등 기동성 면에서 훨씬 뛰어난 이들 병기들은 중세 유럽의 크고 화려한 병기들과 대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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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의 술탄 전용 욕실 ⓒ 홍경선

14~16세기 오스만투르크의 정복시절부터 18세기 제국 시대의 근대적인 무기와 군복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변천사와 함께 무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단연 정복왕 메메드 2세의 칼이다. 이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술탄의 칼이라는 것이 느껴질 만큼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길다란 칼에는 코란의 글귀인 듯한 이슬람문자가 금으로 새겨져 있다. 약간 무뎌진 칼의 끝자락에는 정복왕의 용맹스러움이 묻어난다.

의사당 옆, 정의의 탑 아래쪽에는 술탄의 많은 부인들과 자식들이 생활했던 하렘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약 30분간 영어와 터키어로 진행되는 하렘투어는 별도로 입장권을 끊어야한다. 톱카프궁전 방문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곳의 이름 '하렘'은 '종교적으로 금지된'이란 뜻의 아랍어 '하람'에서 기원된다. 또한 이슬람 교도들에게 약속된 미인들로 가득 찬 천국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렘은 모두 259개의 방과 46개의 화장실, 12개의 창고. 8개의 욕실, 8개의 홀, 병원, 4개의 부엌, 6개의 음식물 저장소, 수영장, 그리고 지하감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곳을 모두 둘러 볼 수는 없다. 유적관리 및 복구문제로 시간이 30분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렘은 외부 세계와 고립된 곳으로 술탄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이 곳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이렇게 외부세계와 차단된 하렘은 화려함과 동시에 평생토록 술탄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경쟁해야만 했던 후궁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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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외부의 모습

이들은 술탄이 정복한 나라에서 데려온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미인들만 엄선하여 이슬람으로 개종된 후 엄격한 훈련을 통해 술탄에게 바쳐진 이들은 술탄의 아이를 낳으면 특별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여자들은 그저 고위 관리들의 부인이 되거나 술탄 가족을 위해 봉사를 해야 했다.

30분간 보여진 하렘의 모습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무엇보다 눈에 띤 것은 술탄의 전용 목욕탕이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세면대와 욕실은 방금 닦아놓은 듯 번쩍거렸다. 금으로 만들어진 수도꼭지를 틀면 금방이라도 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또한 하렘 안팎의 벽과 바닥, 천장 등은 온통 화려한 금장식과 터키블루로 치장되어있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가득 그려진 스텐인드 글라스에서는 햇빛이 스며들며 방안의 장식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 불에 타 없어진 진시황의 아방궁도 이처럼 화려했을까. 수없이 많은 밤을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지샜던 술탄들의 생활이 새삼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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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알현실(제3정원)

하렘을 빠져나오면 '제3정원'이 나온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행복의 문 안쪽에는 술탄이 중요한 업무를 보거나 수상과 외국 대사들을 접견하던 곳인 '알현의 공간(Arz Odasi, Audience Chamber)'이 있다. 대외적인 인사들을 맞이하는 곳인 만큼 내부의 아름다움은 가히 환상적이다. 바닥에 깔린 화려한 양탄자 못지 않게 벽을 장식하고 있는 대리석과 타일들은 하렘의 아름다운 장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또한 이곳에는 신성한 유물을 보관하는 '성의의 공간'이 있다. 바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마호메트의 망토, 칼, 깃발, 활, 발자국, 이빨, 수염, 그리고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일종의 성물로 여겨지는 이들 물건들 외에도 요셉의 터번과 모세의 지팡이도 보관되어 있다. 그 무엇보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중시하던 메메드 2세의 정신의 계승하려는 것일까. 이슬람과 기독교의 성물이 이처럼 같은 곳에 나란히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오른쪽 원정군의 숙소에는 중국의 비단옷과 비슷한 술탄 일가의 화려한 전통의상은 물론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크다는 86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많은 보석들이 전시된 보물관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마지막 정원인 '제4정원'이 나온다. 정원의 왼쪽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골든혼 테라스'가 나타난다. 이곳에 서면 금방이라도 하얀 구름이 손에 잡힐듯하다. 대리석으로 길게 깔린 테라스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테라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이 맑고 투명하다. 오른쪽으로 몇 발자국 걷다보면 화려한 정자가 나타난다. 술탄 메메드 4세에 의해 지어진 바그다드 키오크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러스해협의 경치는 환상적이다. 푸른 바다와 아시아 대륙, 신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다 볼 수 있다.

높이 63m의 갈라타 타워 아래로 제노바 상인의 자치지구인 갈라타지구가 희미하게 보이는가 하면 '파티흐 사원'과 '슐레이만 사원'의 높은 첨탑들이 구름을 찌르고 있다. 사원의 푸른 돔은 하늘과 바다와 함께 서로 그 빛깔을 견주며 뽐내고 있다. 또한 루멜리 요새의 길다란 성곽이 해안선을 감싸안은 채 그 너머로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잇는 보스포러스 대교가 보인다. 이렇게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돌리면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관광지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와 함께 찬란했던 오스만제국의 기나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온 듯한 느낌이 들게된다. 이렇게 숨가쁘게 지나온 톱카프 궁전의 하루는 사원의 첨탑 사이에 걸린 붉은 태양과 함께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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