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모두가 동심의 세계로 빠져든다

<세계문화유산답사> 터키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유적 (2)

등록 2003.04.24 03:25수정 2003.04.2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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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고 사랑스런 땅' 카파도키아. 이곳은 터키의 중심 아나톨리아 고원에 자리잡은 대규모 기암지대다. 불가사의한 바위들로 가득한 이곳은 자연의 모습이 전해주는 그 환상적인 아름다움 이면에 아픈 기독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로마의 박해로부터, 아랍인들의 침입으로부터 도망쳐 온 기독교도들의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엔 동굴이나 바위에 구멍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해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켜낸 기독교인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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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 자연의 극치 '카파도키아' ⓒ 홍경선

지하도시 '데린구유'를 벗어난 버스는 속력을 내며 중부 아나톨리아의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렀다. 주변은 온통 기묘한 바위들뿐이다. 그 사이로 간간히 스텝기후의 영향을 받은 마른 풀들이 고개를 내밀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버스가 멈춘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할라계곡(Ihlara Valley)'이었다.

마치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구멍을 내어 놓은 듯한 계곡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끝자락에 서면 오금이 저려오는 아찔함마져 느껴질 정도로 깊게 파인 계곡의 절경은 마치 인디아나죤스와 같은 액션 어드벤쳐 영화속에서나 봄직했다.

황량한 절벽 위의 모습과는 달리 절벽 아래로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고 물이 흐르는 계곡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이할라계곡'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넓은 협곡 양옆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과거 이곳은 화산에서 분출된 응회암과 용암의 두터운 층으로 덮여있었다고 한다. 그후 침식작용에 의해 길이 15km, 깊이 150m의 협곡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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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의 요새 '이할라계곡' ⓒ 홍경선

수직으로 깎인 웅장한 절벽에는 많은 구멍들이 뚫려있어 거주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곳에 많은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계곡은 육안으로 거의 볼수 없고, 접근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침략자의 탄압과 박해로부터 보호될수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는 10여개의 석굴성당이 남아있는데 저마다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다. 내부는 십자가 모양으로 텅비어있고 둥근 천장과 벽에는 빛바랜 프레스코화들이 그려져 있다. 한때 찬란했던 비잔틴 예술의 극치를 이루던 성화들이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지울수 없었나보다.

계곡의 전체적인 모습은 중국 낙양의 용문석굴과 비슷했다.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양쪽의 절벽에 신앙이 깃든 구멍들이 무수히 많이 뚫려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열망 앞에서는 험난한 자연의 벽도 쉽사리 무너지나보다. 각 구멍마다 치열했던 신앙의 흔적이 오래 시간동안 퇴색하지 않고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수풀을 헤치고, 울퉁불퉁 솟은 바위들을 오르며 걷다보니 온몸에 땀이 묻어났다. 계곡을 달구는 태양의 열기를 피해 몸의 열기도 식힐 겸 잠시 그늘로 숨어들었다. 높은 언덕위로 하늘의 무게가 무거운지 흰 구름이 살짝 걸터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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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할라계곡 석굴성당의 프레스코화 ⓒ 홍경선

이렇게 웅장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곳의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로 그려낸다면 단 네가지 색이면 충분할 것 같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황갈색의 절벽과 푸른 숲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자연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압축미는 인위적인 것으로는 재현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잠시 사방을 둘러보니 문득 중국 무협영화 <진가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청나라의 위협에 맞써 위구르인과 진가락이 힘을 합쳐 이를 물리치는 장면이었는데 그 격전의 장소가 이와 너무나 흡사했다.

청나라 군사들이 협곡에 들어오자 절벽 위에 매복해있던 위구르병사들이 돌과 화살을 퍼부으며 공격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청군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지만 이미 퇴로를 막고 있던 진가락과 위구르인들에 의해 결국 전멸당하고 만다. 이는 중국 투르판의 고하고성 주변에서 촬영한 장면이었지만 이곳 이할라 계곡 역시 적의 침입을 물리치기에는 안성맞춤인 전략적 요지임에 틀림없다.

어느덧 트레킹도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대여섯명의 꼬마들이 당나귀를 타며 놀고 있었다. 가끔씩 당나귀를 태워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으며 돈을 요구하는데 생계유지보다는 그저 신나게 뛰어 놀다 외국인을 보면 신기해하는 동심의 또 다른 애교로 보였다. 무료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노천식당까지 향하는 길목에서 당나귀를 탄 녀석과 달리기 시합을 했다. 소년의 채찍찔에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달리는 당나귀는 생각보다 빨랐다. 한참 뒤에야 도착한 나를 향해 먼저 도착한 녀석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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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이슬람 양식의 '아지카라한' 입구 ⓒ 홍경선

점심메뉴는 케밥과 과일이었다. 비록 맛은 별로였지만 그늘이 드리워진 장소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맑은 물소리가 식욕을 돋구었기에 나름대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버스는 <스타워즈-별들의 전쟁>의 촬영지로 유명한 '셀리메(Selime)'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창밖의 도로 한쪽에 거대한 바위들이 크기순으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외계인들의 집단 거주지 같은 뾰족한 바위들이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미지와의 조우를 꿈꾸며 바위들을 탐사해보고 싶었지만 그게 전부라고 한다.

잠시 스치듯 그곳을 지나간 후 과거 실크로드 대상들의 숙소였던 '아지카라한(Agzikarahan Caravanserai)'에 도착했다. 원래 모스크로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입구는 코란의 글귀가 새겨진 현판과 함께 아름다운 이슬람양식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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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대상숙소 '아지카라한' 내부모습 ⓒ 홍경선

하지만 화려한 입구와는 달리 내부는 별볼일 없었다. 내부의 텅 빈 공간은 과거 이곳에 머물렀던 대상과 낙타들의 휴식처였다고 하지만 그 흔적은 온데 간데 없다. 단지 뻥 뚫린 중앙 돔의 천장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조명역할을 하는 동시에 공기 청정의 역할까지 하고 있어 무척 시원했다.

당시 터키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다. 그러기에 이곳은 실크로드 상인들에게 있어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안락한 곳이었을 것이다. 또 오랜 여정의 끝에 누적된 피로를 풀며 밤새도록 자신들이 겪었던 일화들로 얘기꽃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1271년 동방 여행을 떠났던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에도 카파도키아를 설명한 글이 있으니, 어쩜 그 역시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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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바계곡의 바위1 ⓒ 홍경선

이처럼 동서 문명의 융합을 도모했던 대상들의 숙소였으니 자연스레 이들을 노리는 강도와 도둑들도 많았으리라. 이에 대한 방비로 숙소는 견고한 석조 건물로 만들어졌다. 마치 거대한 철옹성과 같은 모습으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벽의 두께는 1m는 되어 보였다. 이처럼 한때 실크로드를 주름잡던 대상들로 가득했던 이곳은 이제 휴식을 취하기 위한 관광객들의 휴게소가 되어있었다.

시원한 그늘아래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음 코스인 도자기공장(Avanos)으로 향했다. 화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도자기들로 가득한 그곳은 공장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관광객들에게 도자기를 파는 가게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이곳에 들른 관광객들에게 직접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아량을 베풀 뿐이었다.

한 청년이 능숙한 솜씨로 도자기를 만들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초등학교때 도자기공장에 견학을 가서 직접 만들어본 경험까지 있는 한국인과는 달리 영화 <사랑과 영혼>으로나마 살짝 맛을 본 서양인들에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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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샤바계곡의 바위2 (발기한 남성의 성기모양) ⓒ 홍경선

차까지 타주며 친절을 베푸는 종업원들의 상술에 한국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려준 후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웠던 태양의 열기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제 버스는 카파도키아 1일 투어의 마지막이자 백미로 손꼽히는 '파샤바 계곡(Pasabag Vally)'으로 향했다. 카파도키아에서만 볼 수 있는 각종 천연 자연의 조형물들로 가득한 이곳은 이 지역 최고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창밖에서부터 놀라운 광경이 연속으로 펼쳐졌다. 갖가지 모양의 기암들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바위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뽐내며 여행의 막바지에 달은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보는 이에 따라 천차만별인 바위들은 무한한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고깔모자를 뒤집어 쓴 마법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가 하면 스머프들이 살고 있는 버섯지붕의 집들도 눈에 띄었다. 또 귀를 쫑긋이 세운 토끼모양과 발기된 남성의 성기모양 등 그 종류를 헤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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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샤바계곡의 바위3 (토끼모양) ⓒ 홍경선

특히 높이 20∼30m의 버섯바위들은 마치 크림케익의 가장자리처럼 주름이 잔뜩 잡혀있어 보는 이를 신비감에 빠지게 한다. 또 머리 셋 달린 기린마냥 한 기둥 위에 세 개의 버섯바위가 있어 기묘한 사진을 찍기에는 그만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곳의 바위들이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해가 비치는 방향으로 자라는 나무들처럼 이들 역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깔모자를 쓴 마법사가 주문을 외웠던 것인가. 마치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놓으려는 듯 그들은 자신을 닮은 바위기둥들을 사방에 심어놓았다.

이곳 파샤바계곡은 일명 '수도사의 계곡(Valley of the Monks)'으로 불리기도 한다. 수도사들이 뒤집어쓴 옷의 머리 모양과 닮은 바위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대한 버섯바위 속에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와 은신처들이 즐비하다.

하나의 건물처럼 거대한 바위 곳곳에 뚫어놓은 구멍속으로 많은 교회들이 빛바랜 프레스코화를 그 흔적으로 남겨놓고 있다. 각각의 구멍들 사이를 이어놓은 통로는 미로 찾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숙여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지만 곳곳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찾는 재미에 취하다보면 그런 불편쯤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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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자연의 조형물 '파샤바 계곡' ⓒ 홍경선

바위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일몰이 시작되자 붉은 햇살을 살짝 머금은 기암괴석들이 파노라마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동화 속 환상의 나라에 서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바위들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가르치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가르치는 기암괴석과 기독교인들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교회들, 그리고 세계 9대 불가사의로 불리우는 지하도시. 이곳의 자연은 해발 3000m급의 화산 폭발로 형성된 응회암이 풍화작용으로 깎여나가 만들어졌다.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땅속 깊은 곳에 도시를 만들어 끝까지 생존하면서 그들의 종교를 지켜내었다.

그후 동방의 투르크족이 밀려들어 이슬람의 땅이 되고 이슬람의 예배 공간인 모스크와 일반 주택들이 들어섰다. 이처럼 시대를 달리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였기에 1985년 세계문화유산(터키 괴레메 국립공원과 카파도키아 바위유적)으로 지정되어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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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샤바 계곡 수도사의 은신처 ⓒ 홍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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